[의약학부] 故 이문호 박사 회상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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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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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이동수 서울대학교 교수
고 이문호 박사님은, 회고록 서문에 지나온 나의 인생을 영광과 회한의 ‘순간’이라는 소박한 단어를 선택함과 동시에, “60년간 의료와 의술의 두 기둥을 붙들고 외길을 걸어오심을 후회 없다”하며, 후학의 ‘영원한 거울’로 남길 원하였던 진정한 의학자였다. 독일유학시절 내과학 및 핵의학을 공부하고 핵의학을 임상의학에 접목시키며, 정년퇴임할 때까지 40여 년간을 모교 서울대 교수로 연구와 진료, 후학의 지도에 힘썼으며, 대외적으로는 의료계 등 활발한 사회활동을 하며 의학사랑에 대한 집념을 의학발전으로 승화시킴으로써 우리가 잠시 잃고 있던 개척자의 정신을 일깨우게 한다.
어린 시절 
청봉 이문호 박사님은 1922년 10월 6일에 수안군 대성면 황수리에서 출생했다. 이 박사님의 부친은 수안 이씨 존암공파의 후손이다. 교사였던 아버님의 성품을 본받아 공부하기를 좋아하여 늘 책을 읽거나 공부에 열중하셨다. 보통학교 시절, 이 박사님은 명랑하면서도 호기심이 많은 학생이었는데 책과 공부를 좋아하여 성적은 우수했지만 성품은 그다지 방정하지 못했다고 한다 (박사님이 내리신 특별 평가). 보통학교는 신막에서, 중학교는 해주에서, 대학은 서울에서 졸업하셨다.
보통학교 1학년 아버님께서 억울하게 학교를 그만둘 때까지 박사님은 선친처럼 교사의 꿈을 가졌다. 그러나 일제치하에 조선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직업이 자유업이라는 선친의 조언을 들으시고 교사의 꿈을 접었다. “네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할 수 있는 일을 선택하라”하였던 선친의 조언이 박사님 인생의 이정표가 되어 평생을 의학과 함께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의학도의 꿈
보통학교 5학년 수학여행 때 창경궁 건너편을 가리키며 우리나라 으뜸이라고 하신 선친의 말씀을 계기로 이 박사님은 경성제국대학에 들어가기로 다짐했다. 박사님은 중학 4학년을 수료하고 (당시 전문학교를 제외한 고보 4학년이면 지원 가능했다) 경성제대 의예과에 응시했으나 2차 시험에 불합격통지를 받고 5학년에 진학 후 잠시 방황하기도 했다. 당시 영어를 가르치던 고광만 선생님의 “한번 실패했다고 삶을 포기한 듯이 생활해서 되겠니?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자가 승자다”라는 격려의 말씀을 듣고, 최선을 다할 때의 당당하였던 당신의 모습을 떠올리며 공부에 더욱 매진했다. 그 결과 이듬해에 경성제대 의예과에 당당히 합격했다. 
경성제국대학 예과 시절과 독일유학의 꿈
당시 의예과 시절은 1940년대 초 태평양 전쟁 전후인데다 일제의 근대화가 막 진행되던 때라 불안정하고 어수선한 상황이었다. 예과 2학년이었던 1943년 전쟁이 극에 달하자 일본은 우리나라 학생들에게도 일본에 충성하는 학도병이 될 것을 회유했다. 패전되기 1년 전인 1944년 8월이 되자 대학생에게까지 의무적인 징집명령이 떨어져 선생님께서도 출전을 강요받았다. 그러나 곧 해방이 되어 의학공부를 계속할 수 있게 되었다. 
해방이전에는 일본이 독일과 동맹관계에 있었고 일본 학자들 대부분이 독일에서 공부를 했 때문에 이공계 및 의대 학생들에게 있어 독일어는 매우 중요한 과목이었다. 많은 학생들은 일주일에 12시간 이상 되는 독일어 과목에 낙제했지만, 이 박사님은 후퍼 (Hupfer) 교수의 열정적인 강의로 독일문화나 가곡 등을 접하며 독일에 가고 싶다는 꿈을 키웠다. 독일어에 심취했던 박사님은 하숙집에서 알게 된 선배 황득현 선생의 도움으로 경성제대 독일어 회화 모임을 통해 유창한 구사능력을 접하고 이를 계기로 더욱 독일어에 심취, 예과 졸업 시에는 독일어 우수상을 수여받기도 했다. 황득현 선생은 내과를 공부하며 생화학 분야를 통해 기초의학의 필요성을 느껴 서울대 물리학과로 전과, 이후 1952년 한국학생에게 주는 첫 DAAD  (Deutscher Akademischer-Austauscher Dienst)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물리학 전공을 위해 독일로 유학을 떠난 분으로써 이 박사님의 독일 유학의 꿈을 다지게 한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다. 이러한 이 박사님의 외국어에 대한 열정과 독일유학 꿈은 후일 이 박사님 일생의 행로를 결정해주는 근원이 되었다. 
해방이 되자 많은 귀환동포들이 돌아왔고 이들은 오랜 외지 생활로 대다수가 병마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 박사님은 구휼부를 조직하고 서울대 현 치과병원 자리에 외래와 무료 환자병동을 마련해 그들을 진료하고 급식을 제공했다. 그러나 식량보급이 여의치 않게 되어 3개월 이상 지속되기는 어려웠다. 해방 후 모든 기관이 어수선한 것처럼 의학부 역시 6개월간 거의 강의가 이뤄지기 않아 귀환한 환자들을 치료하면서 실습과 임상을 대신했다. 이후 1946년 3월 26일, 34명의 동기생들과 함께 의예과 2년 반과 본과 3년 반을 합해 6년의 의학교육을 마치고 졸업장을 받았다. 
6·26 전쟁과 날아간 미국유학의 꿈
해방이전까지 모든 학문이 독일에 기반을 두었으나, 해방이후 영어 중심의 학문이 주류를 이루면서, 많은 이들이 미국 유학을 꿈꿨다. 이 박사님께서도 영어를 공부하기 시작했고, 1950년 봄 미 국무부성 유학 장학생 모집시험에 합격하면서 미국 유학계획을 굳히게 되었다. 9월쯤으로 출국이 예정되고, 유급조교로 내과를 전공하던 이 박사님은 순환기 계통의 적당한 학교를 알아보고 있었다. 그러나 모든 준비가 끝나고 미국으로의 출발을 3개월여 남긴 시점에 6.25동란이 발발, 서울이 점령당하며 또 다시 시련을 겪게 되었다. 
용산근처에 정착한 월남한 부모님과 함께 친미 성향의 오해를 받기 충분한 이 박사님은 그들의 명령에 불복종한 반동분자로 처단될 가능성이 매우 컸다. 그런 이유로 당분간 숨어 있거나 피해 다닐 수밖에 없었다. 외가친척이 있는 금촌에서 3개월간 피난생활을 하면서 이 박사님은 미국유학의 꿈을 접고 미래를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불안정한 생활을 해야만 했다. 9월 28일 유엔군 참전으로 서울이 수복되자 병원가족과 합류했지만, 곧 북진하는 국군을 따라 황해도로 이동하여 잠시 고향에 머물며 신막 읍사무소에 진료소를 만들어 진료활동을 했고, 1·4 후퇴로 다시 서울대학병원에 합류했다. 이 박사님은 제36군병원에 소속되시어 당시 병원장이시던 김동익 교수님 인솔아래 1만 톤급 배에 병원기자재와 약품 등을 싣고 인천항을 출발하여 부산에 배치되었으며, 이 후 또 다시 제주로 이동하여 환자를 진료했다. 이 박사님의 제주 생활이 어느 정도 안정을 찾게 될 즈음 안타까운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이 박사님을 따라 피난을 오던 사모님과 따님 중 추위와 배고픔으로 따님이 객지에서 사망하고, 중공군의 서울진입으로 강제 추방되어 뒤늦게 한강을 건너던 어머니와 어린 동생 분마저 유엔군의 기총 사격으로 사망하게 되었던 것이다. 석 달쯤 지나자 전세가 호전되었고, 이 소식으로 가족을 잃은 집안일로 마음이 복잡하던 이 박사님은 서울이 완전히 수복되지 않았지만 서둘러 서울로 돌아와서 전임강사 자격으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때 독일에서 선발하는 DAAD 유학생 응모를 문교부에서 진행한다는 소식을 접하자 군필을 위해 자원입대하고, 공무원자격으로 예비역으로 편입했다. 이로써 다시 꿈에 그리던 독일유학을 준비하게 되었다.
DAAD 장학생 선발과 진로 결정
휴전이후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안정되어 가면서 다시 학계에 유학에 대한 움직임이 꿈틀댈 즈음 이 박사님은 1954년 DAAD 장학생에 선발되어 독일유학 계획을 준비하게 되었다. DAAD 장학생이 되었지만 어떤 대학으로 가야 할지 결정을 못 내리고 있던 중 서울에서 개최되는 대한의학협회 주최 학술대회에서 특별강사로 초빙된 W.D Germer 박사와 대면하게 되었다. W.D Germer 박사는 부산 독일 적십자 병원의 내과병동 책임자로, 선생님의 독일유학 계획에 장미빛 희망을 이야기해 주었다. 
이 박사님은 Germer 박사의 조언을 계기로 프라이부르크 (Freiburg) 대학의 하일마이어 (Heilmeyer) 교수님께 지도 받으리라 결심하고 허가의 편지를 받았다. 그 당시 하일마이어 교수는 프라이부르크 내과 주임교수로 부임한지 얼마 안 되었지만 세계적인 혈액학 교수로, 외국의 원조나 돈 많은 아랍계 왕족들이 주로 찾아올 정도로 명성이 높고 임상의로 독일뿐 아니라 유럽에도 널리 알려진 분이었다. 
1년이라는 짧은 시간적 한계에 대한 조바심과 어려운 집안사정으로 무거운 마음이었지만, 1954년 10월 독일 유학길에 오르며 열심히 공부하고 돌아와 더 열심히 일하겠다는 각오를 다짐했다. 
독일유학 생활과 독일의 임상강의
이 박사님은 유학 초반, 독일의 가장 남쪽에 위치한 작고 조용한 도시인 프라이부르크는 한가로움과 혼자 공부하는 외로움, 의사소통의 자신감 감퇴로 독일을 떠날 기회를 엿보기도 했다. 하지만 이도 잠시, 11월 초 시작하는 겨울학기를 시작으로 대학을 포함한 도시전체가 살아 움직이며 활기를 띄게 되었고, 대학본부 건물 한쪽에 새겨진 ‘진리는 그대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Wahrheit wird euch frei machen)'의 문구를 가슴에 새기며, 이 박사님의 프라이부르크 대학 생활은 본격적인 시작을 맞이하게 되었다. 
선생님은 하일마이어 박사를 통해 순환기 전문의 Klepzig 병동장을 소개받았다. 대학근무 동안 그분과 EKG 책자를 출판하고, 귀국 후 1960년에는 그분이 저술한 <급성병환의 감별진단과 치료>를 이장규 박사님과 공동번역, 출판했다. 한주에 한번 있는 90분간의 하일마이어 교수의 임상강의는 환자를 진찰하며 문진, 타진, 청진 등에 대해 대강당을 꽉 채운 학생들 중 서너 명을 지적해 질문하며 토론식으로 이뤄졌다. 유학 3년 동안 이를 통해 관찰한 환자는 이 박사님께서 일생동안 내과계 환자를 볼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될 정도로, 희귀 병례를 포함한 수많은 병례를 실제로 볼 수 있는 귀중한 경험이었다. 이 박사님께서는 “아쇼프 하우스 (Aschoff Haus) 병리학교실에서의 부검견학과 강의는 독일 유학시절의 의학을 상기시킬 때 가장 인상적이고 현장감을 느끼게 했다”고 술회하신 적이 있다. 프라이부르크 대학병원에는 책에서만 보던 진귀한 환자들이 유럽 각지에서 모여들었는데, 회진시 각종 혈액환자들을 접하고 혈액 연구실에서의 수많은 슬라이드와 자료들을 보면서 이 박사님께서는 은연중 혈액학을 전공하겠다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하일마이어 교수 댁에 초대된 역사적인 크리스마스 밤
그 해 크리스마스, 하일마이어 박사 댁에 초대 받으신 행운은 이 박사님께 또 다른 의학을 접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앞으로의 계획에 대한 하일마이어 박사의 질문에 이 박사님은 “한국에서 순환기를 중점적으로 연구했으나, 독일에서의 유학생활을 통해 교수님으로부터 혈액, 임상에 관심을 가지시고 연구하고 싶다“는 각오를 피력했다. 하일마이어 교수는 ”기존의 혈액학은 형태학과 생화학 연구를 중점적으로 했지만 방사성 동위원소는 발전가능성이 확실한 새로운 학문 (1960년 초에 핵의학이란 용어와 학문이 창설됨)“이라며, ”종래의 혈액학을 공부하면서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도록 하는 것도 좋지 않겠나?”라고 권유했고, 이 박사님은 카이더링 (Keiderling) 박사와 연구실을 만들어 보라는 하일마이어 교수의 권고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 박사님에게 있어 그날의 크리스마스 밤은 이 박사님 일생의 진로를 결정하게 한 역사적이고 숙명적인 밤이었다. 
핵의학과의 인연
1955년 새해 하일마이어 박사는 카이더링 박사와 함께 연구실을 만들어 연구를 시작하도록 기회를 주고, 1년 이후의 장학금 (DAAD 혜택이 끝나고 훔볼트 재단 장학생으로 선정되어 배우자와 자녀를 위한 보조금도 지급되었다)에 대한 문제도 해결해 주었다. 
그 당시 방사성 동위원소는 영국과 프랑스에서 만들어졌는데, 이 박사님은 영국에서 구입한 Fe-59를 사용하여 집토끼 실험을 시작했고, 1955년 9월 제5차 유럽혈청학회에서는 방사성철과 크롬 (Cr-51)을 이용한 감염성 빈혈에 관한 연구를 발표했다. 이 후 I-131과 갑상선기능 항진증과 갑상선 암의 치료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했다. 프라이부르크는 북 스위스 쪽에 위치한 곳이라, 주로 옥소 결핍으로 발생하는 지방성갑상선종 환자들이 많이 발생하는 지역이었다. 그 동안 핵의학 혜택을 받지 못했던 주민들이 내과의 방사성 동위원소실이 신설되자 수많은 갑상선 환자들이 모여 치료를 받게 되었다. 이 박사님은 이를 계기로 귀국 후에도 서울대병원에 방사성 동위원소실을 창설하게 되었고, 환자의 대부분이 갑상선 환자가 되면서 실험이나 연구는 밤늦게 또는 주말에 할 수 밖에 없는 바쁜 나날을 보내야 했지만, 후일 “큰 보람과 흥미를 느꼈다”고 당시의 상황을 술회하셨다.
1957년 가을, 이 박사님은 4년간의 독일생활을 마치고 박사학위와 함께 한국으로 돌아왔다. 귀국 후 이 박사님은 한국의학협회의 중요 멤버로 활약하고, 서울대 의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핵의학과 혈액학, 신장학, 갑상선학 분야의 신학문을 국내에 도입, 발전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특히 1958년 6월11일에 대한혈액학회를 창립하고 초대 총무부장을 맡기도 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방사성 동위원소 진료실과 업적
초기에 가장 활발했던 방사성 동위원소 연구 분야는 의학에 응용하는 것인데, 이는 몇 가지 간단한 장비만 갖추면 수행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1950년대 중반 국내외적으로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는 가운데, 이 박사님은 국제원자력기구 (IAEA)의 지원을 받아 1960년 5월 30일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에 우리나라 최초로 방사성 동위원소 진료실을 신설하고 초대 실장을 역임하게 된다. 진료실은 방사성 동위원소를 이용하여 각종 질환의 진단과 치료를 하고, 이를 학문의 연구에 활용하여 원자력의 평화적 특히 의학적 이용에 관한 인류의 노력을 실천하는 데 목적을 두고 설립되었다. 
이 박사님은 이를 통해 여러모로 열악한 환경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방사성 동위원소를 이용한 의학적 연구에 큰 야망과 포부를 갖고 있던 이장규 박사 (약리학교실에서 연구), 고창순 박사 (내과 수련의), 강수 박사 (약리학 조교), 서병준 박사 (산부인과 대학원생) 등 젊은 후배들과 함께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연구 및 진료에 힘썼다. 이 후 이 박사님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은퇴하기까지 총 78명의 박사를 지도 배출했다. 
1959년 원자력원의 위탁연구비로 I-131의 진단과 치료에 대한 연구를 진행해 1960년 열린 제2차 원자력학술회의에서 그 결과를 발표했다. 당시 취재진들에 의해 무색, 무미, 무취인 방사성 동위원소 옥소를 몇 cc만 마시면 목 밑의 큰 혹도 없어지는 ‘신비의 물’이라 보도됨으로써 전국의 환자들이 몰려 곤혹을 치르기도 했다. 1961년에는 Au-198을 이용하여 간 영상진단을 시작했고, 동위원소를 이용한 각종 질병의 치료를 종양 등의 치료로 확대했다. 1961년에는 대한핵의학회를 창립하기도 했다. 1962년 제3차 원자력학술회의가 개최되었는데, 이에 앞서 추진분과위원회가 구성되었고 이때 선생님은 제3분과 위원장을 역임했다. 그리고 같은 년도에, 의학연구에 공을 인정받아 당시 한국의 노벨상이라고까지 알려져 있던 제3회 삼일문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 박사님은 한국인 최초로 빈혈에 관한 연구보조금을 3년간 지원 받았는데, 중점적인 연구는 서유럽에서는 드물지만 한국 같은 개발도상국에서 많이 보이는 철결핍성 빈혈 중 구충성 빈혈에 관한 연구를 시도했다. 구충성 빈혈 환자에서 Fe-59를 사용한 연구는 1960년 초부터 1970년대 초까지 10년간 자원희망자 28명이 참가하여 인체 실험으로 수행되었다. 여기서 선생님의 연구에 대한 집념과 사랑을 다시 상기할 수 있는데, 이 빈혈기전 연구에 직접 동참하여 몸소 기생충 알을 복용하고 빈혈을 체험하며 연구 업적을 성취했다. 이 연구 성과는 국제학회나 IAEA에도 알려져 국제적인 빈혈 심포지움에 초청되어 발표를 갖기도 했다. 또한 1969년에는 IAEA와 혈액표준위원회 (ICSH) 위원 자격으로 빈, 워싱턴, 제네바, 카이로 등지의 심포지움에서 초청 발표를 하기도 했다. 이 박사님은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서 1975년, 학자로서 우리나라 최고의 상인 제 20회 대한민국 학술원상을 수상했다. 또 1983년에는 아시아 지역 최초로 아·태 핵의학회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개최함으로써 한국 의학이 국제무대로 진출하는 첫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암 연구소 소장 시절
1960년대 해마다 3만여 명에 달하는 암환자가 늘어나면서 암에 대한 관심이 서서히 증가할 무렵, 이 박사님은 대(對)암협회를 창립하고 범국민 운동의 주도적 역할을 했다. 대암협회 창립 후 일반국민들에게 조기진단의 필요성을 적극적으로 계몽하고, 암 퇴치를 위해 전 의료계는 물론, 전 국민이 협력할 것을 호소했다. 
이 박사님은 1977년부터 1988년까지는 1963년 설립된 서울대학교 암연구소 4대 소장을 역임했다. 그 당시 암연구소는 약 350평 규모의 소규모였지만 무균 동물사육장을 마련하며 연구 환경의 현대화를 추진함으로써 한국의 의료와 의학을 서양의학에 접목하기 위해 노력했다. 또한 정년을 앞두고 암연구소의 지속적인 연구 활동을 위해 1988년 1월 28일 대한암연구재단을 설립했다. 재단 기금으로 선생님이 5천만원, 녹십자 허회장이 5천만원, 합계 기금 1억 원을 출연, 기본 자산을 조성하고 과학기술처에 법인 설립 허가를 받아 그 후 이사장에 취임했다. 
서울대학교를 떠나며
이 박사님은 1988년 2월 29일 정년퇴임식을 하게 되었다. 많은 희생과 시련을 겪었지만 이 박사님은 “1946년 3월 경성대학 의학부를 졸업한 뒤 1988년 40년을 모교 의과대학에 봉직했다. 돌이켜 보면 의학교육자로서 순탄한 길을 걸어온 행운아가 아닌가 생각된다. 많은 이들의 도움과 사랑을 받으며 교수로서의 길을 걸어온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이 박사님 의학박사 학위 취득을 위해 독일 유학의 길을 떠난 기간을 빼고는 경성제대 의학부 졸업한 뒤 일생동안 한시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과 떨어져 지낸 일이 없었다. 1946년 10월 서울대 교수 유급조교로 발령을 받고, 1953년 3월 전임강사, 1962년 부교수를 거쳐, 1960년부터 1971년까지 서울대 병원 동위원소실 실장을 역임하고 한국에 핵의학을 처음 전하였다. 1965년 교수로 임명되고, 1970년부터 1975년까지 내과주임교수 및 과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이 후 정년퇴직까지 제4대 암연구소 소장을 역임했으며, 서울대 교수 생활을 마감하는 자리에는 의료계를 비롯한 각계인사 600여명이 참석하기도 했다. 이날 이 박사님께서는 ‘한국의 오진률과 질병 형태 변천’에 관한 내용으로 고별 강연을 하기도 했다. 
의사단체와의 인연과 업적
이 박사님은 학문 연구에서 뿐만 아니라 의사단체 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무수히 많은 일들을 하였지만 일일이 열거하기 부족하여 주요 활동 몇 가지만 나열해본다.
우선, 1972년부터 1994년까지 6대에서 14대에 이르는 대한의학회 회장을 역임하면서 한국의학의 기초를 든든히 잡았고, 전문의 고시실행위원회 위원장으로 한국의 전문의제도 발전에 공헌했다. 1998년부터 2001년까지 한국보건의료인 국가시험원 초대원장으로 우리나라 의료면허시험의 근간을 세웠고, 1972년부터 1985년까지 세계핵의학회 이사를 역임, 1974년부터 1975년까지는 대한내과학회장을 1975년부터 1978년까지 대한내과학회 초대이사장을 역임했다. 대한핵의학회, 암학회, 갑상선연구회, 수혈학회, 국제혈액학회, 아세아대양주 혈액학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1977년부터 1988년까지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암연구소장을 역임하며, 이를 계기로 1988년 창립된 한국암연구재단 이사장직을 마지막으로 임종시까지 암 연구에 대한 열정을 몸소 실천으로 보여주었다. 1989년부터 아산중앙병원 초대의료원장으로 중앙병원 창립에 주도적 역할을 했으며,  1998년까지 아산재단의 의료상임고문으로 중앙병원 발전에 기여했다. 1981년에는 학술원 정회원에 선출되기도 했다.
이 박사님의 학문에 대한 열정은 박사학위를 수여한 80여명의 제자를 배출한 것으로도 증명되며, 현재 국내 유수대학에서 수십여 명의 제자들이 혈액종양학, 핵의학, 신장학, 내분비학, 호흡기내과학, 감염학, 류마티스학 등 여러 분야에서 교수로 활약하고 있다. 또한, 후학교육에 보탬이 되길 바라시는 마음으로 1988년 서울대를 정년하면서 많은 장서들을 1차 기증했고, 2000년 9월 2천여권에 달하는 의학 도서를 가천의대에 기증했다. 
이러한 이 박사님의 아낌없는 헌신과 빛나는 업적으로 한국 의학계의 발전에 끼친 공로가 인정되어 1961년 ‘삼일문화상’을 비롯해 1975년 ‘대한민국 학술원상’, 1988년 ‘대한민국 국민훈장모란장’, 1992년 ‘대한적십자사 인도장 (금장)‘을 수상했고, 1995년에는 한국과 독일 양국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독일 정부가 수여하는 ’십자공로대훈장‘도 받았다. 이 후에도 1997년 ’대한수혈학회 적십자 의술공로상‘, 1998년 제8대 ’자랑스러운 서울대인상‘, 2001년 제2회 ’함춘대상‘ 등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 박사님의 의학 발전에 대한 헌신은 진료와 연구 뿐 아니라 앞서 서술한 바와 같이 여러 사회단체 활동에도 나타난다. 이 박사님의 회고록을 바탕으로 각 단체에서 활동한 내용을 간략히 정리해보았다.
서울시의사회와 만남
서울시의사회와 만남은 독일 유학시절 저널에 관심이 많았던 이 박사님께서 대학신문이나 조선일보 등에 글을 기고하면서 그 인연이 시작되었다. 이 박사님은 유학 후 어느 날 서울 소인이 찍힌 <의사신보>라는 신문이 편지와 함께 배달되었는데 당시 한국에서 의료계 신문을 찾기 어려웠던 터라 매우 반가웠다 했다. 편지에는 그 당시 미국의 의학소식은 넘쳤으나 독일의 의학정보는 전무하여 해방 전 독일과 일본의학을 공부하던 선배들의 향수를 위해 독일 통신원의 역할을 해달라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이 박사님은 이를 계기로 귀국 전까지 몇 십 편의 글을 <의학신보>에 기고했고, 귀국 후에도 <의학신보> 편집간사위원으로 좌담회 등 지속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던 중 제3공화국 출범으로 의료계 또한 지각변동을 겪게 되었다. 1961년 8월 27일 정부는 전국의사들에게 ‘혼란 조장을 엄단한다’는 제목의 의협 개선에 관한 담화를 발표하고, 이에 발맞춰 서울시의사회는 1961년 8월 29일 재건 총회를 개최하여 새로운 집행부를 구성, 1961년 8월 31일 서울시 의사회에서는 이 박사님께 학술부장 겸 의사신문 편집인으로 선임하면서 의사협회에 첫발을 내디디게 되었습니다. 
이 박사님은 1961년 10월 논문 발표를 위해 일본에서 개최되는 원자력학술회의 한국대표로 참석, 당시 만나기 어렵다는 일본의사회 회장인 다케미다로 박사와 면담을 통해 한일 의료문화 교류를 전제로 한 시찰단의 정식으로 초청을 성사시켰다. 이처럼 이 박사님의 뛰어난 학술 업적은 국외 학술활동 중에 한일 의학 교류의 물꼬를 트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으며, 1965년 3월 17일부터 29일까지는 한일 의학문화 교류의 결실을 맺는데도 큰 역할을 했다. 
이 박사님은 6년여 동안 서울시의사회 활동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일중 하나로 서울시의사회 기관지인 <의사신문>을 꼽았다. 편집인으로 활동하면서 여러 회원들의 도움을 받아 의사신문이 의계 전문지로 위상을 확립하는데 선도적인 역할을 했다. 당시 활동의 일환으로 대한암협회 발족에도 힘썼으며, 의사신문을 통해 장학 사업을 시작함으로써 이를 통해 많은 훌륭한 의사들을 배출하기도 했다. 1962년에는 의사신문의 동경지사를 설치하고 이를 계기로 한일 양국 간 외교적 교류가 없는 상황에서도 의학이나 의료계의 정보교류를 시작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대한의학회와 함께한 22년
이 박사님은 1969년 대한의학회 전신이던 분과학회협의회 기획이사를 맡으면서 대한의학회와의 인연을 맺게 되는데, 그 뒤 1971년 부회장을 거쳐 1972년 회장으로 선출되어 1994년까지 22년 동안 수많은 활동을 하게 된다. 우선, 임기 동안 대한의학회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의학회에서 전문의 고시를 주관할 수 있도록 했고, 의협의 의학교육 및 학술 진흥사업을 지원했다. 이밖에도 창립 당시 34학회로 시작한 의학회를 현재 53개 정회원 학회와 54개 준회원 학회의 협의체로서 적극적인 각 분과 학회의 학술활동이 가능하도록 그 기틀을 다듬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96년 대한의학회 창립 30주년 기념식에서 특별공로상을 수상했으며, 1999년 7월에는 이 박사님의 흉상이 대한의학회에 건립되기도 했다.
대한혈액학회 창립
1966년 혈액학회 회장을 역임하면서 이 박사님은 임기 초반 회원들의 친목을 강화시켰으며 1979년엔 의학계로서는 가장 처음으로 아시아태평양혈액학회를 개최했다. 이는 다른 학회에 “우리도 국제학회를 개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는 초석이 되었다. 이 박사님은 1979년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개최된 제18차 국제혈액학회(ISH) 부회장으로 선출되었고 이 후 명예회장으로 추대되었다. 또한 1998년 제29회 국제혈액학회의 국내 유치에 성공하며, 2002년에 치뤄진 국제혈액학회의 서울대회를 대회장으로써 성황리에 개최하기도 했다. 
대한핵의학회 창립
대한핵의학회는 1961년 11월 초 이 박사님이 중심이 되어 서울의대에서 발기되었고, 12월 창립총회를 개최했다. 이 박사님은 동 학회의 첫 회장을 역임하며, 1년에 한 번씩 임상의들을 위한 방사성 동위원소 취급과 이용에 관한 기초훈련을 실시했다. 아시아에서는 최초로 국제핵의학 심포지움을 개최하고, 일본원자력 학술회의와 한국의 원자력학술회의에서 여러 학술논문을 발표하며 핵의학에 관심을 집중시킴으로써 이후 많은 박사들이 배출되었으며 방사성 동위원소실은 ‘박사공장’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핵의학의 선진적 의학영역을 국내에 알리는데 크게 공헌했다. 
이 박사님은 IAEA에서 주관하는 국제혈액측정치표준국제위원회 위원으로 선정되어 빈(Wien)과 NIH에 참여하기도 했으며, 창립 20주년이 되는 1980년 초에는 제3차 아시아 대양주 핵의학회인 국제학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갑상선연구회 발족
1977년 이 박사님은 핵의학의 발전을 갑상선질환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로 진행하게 되었는데, 이를 위해 의학정보 교류를 목적으로 한 학술모임인 갑상선연구회를 결성하여 초대회장으로 선출되었다. 또한 1989년에는 국제갑상선학회(AOTA)의 성공적인 개최를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이 박사님은 이외에도 의학공부에 대한 지침서 등을 저술했는데, 1977년 단순한 내과학이나 내분비학이 아닌 <갑상선학>을 시작으로 1980년도 후반에는 <갑상선세포진(細胞診)>, <알기쉬운 갑상선해설>을 출판하기도 했다.
대한내과학회 이사장 시절
이 박사님은 1962년 대한내과학회 학술부장에 취임하며 내과학회 발전을 위한 제2의 도약시대를 열게 되는데, 우선 대한내과학회 잡지의 편집인 책임을 맡으면서 학회지를 월간으로 발행하였다. 50년대 연 2회, 1961년부터 격월로 발행되던 학회지는 월간이 되면서 처음에는 논문 수집 등 여러 어려움을 겪었으나, 2년 후 본 궤도에 올라 당시 취소되었던 제3종 우편물인가 허가 및 미국 보건교육 보건성국립의학도서관에서 정식으로 Index Medicus에 색인됨으로써 우리 내과학회지의 큰 발전을 이끌었다. 
회장제도에서 1974년 10월 이사장제도로 새로운 집행부의 체계를 갖추면서 이 박사님은 초대 이사장으로 선출되었다. 또한 대한내과학회 이사장을 맡으면서 연구의 활성화 및 학문공유, 후학양성을 위한 여러 사업을 진행했는데, 임기 첫해에는 내과를 개원하고 있는 의사들을 대상으로 최신 내과학의 동향과 학문 및 기술을 전달해주는 의학강좌를 시작했다. 이밖에 학술대회와 병행하여 전공의를 위한 의학강좌를 신설하기도 했다. 1974년부터는 찬조회원제도를 도입하여 20개의 제약회사를 비롯한 관련회사들이 등록해 학회 기금조성에 큰 역할을 했다. 
이 박사님은 전문의시험에 있어 기존에 문제되었던 문안작성과 시험방법 등을 연구, 개선하여 내과 전문의의 의학수준을 높이는데 큰 디딤돌 역할을 하기도 했는데, 그 결과 명실공히 실력 있는 내과 전문의 배출에 큰 기여를 하게 되었다. 
이 박사님은 1997년 4월 15일 제29차 의협대의원총회에서 제9회 동아의술문학상 저작상을 수상했다. 건국 이래 최초로 교과서용인 한국판 <내과학> 상하권을 발간하면서 국가가 요청하는 국적 있는 의학교육의 기본방침을 수행하는데 크게 이바지한 공로를 인정받으신 결실이었다. 하지만 이 박사님은 수상소감을 통해 오히려 열정과 정성으로 참여했던 전국 100여 명에 이르는 내과학 교수들의 공으로 돌리며 “수상한 <내과학>은 Harrison의
을 번역한 것에 불과하다”며 우리말로 정립된 의학 용어를 사용한 한국적 내과학 교과서의 출판을 아쉬워하기도 했다. 이 박사님의 이러한 소망 때문이었을까, 1999년 후배들에 의해 국내 <내과학 (I)>이 출간되게 되고, 이 책을 받은 이 박사님께서는 매우 기뻐하셨다.
전문의제도 개선을 위한 노력
1970년대 초반부터 전문의제도 개선 및 전문의시험 등은 의료계뿐 아니라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고 있었다. 1971년 9월 분과학회협의회 부회장이었던 이 박사님은 보사부장관과 만나서 당시 자율적으로 잘 담당하고 있는 전문의시험 관계사항에 대해 보고하고 의료계의 요망사항인 분협이나 의협에서 전문의시험업무를 관장할 수 있도록 부탁했다. 이를 계기로 후에 전문의시험 문제는 의협으로 이관되고 곧 의사의 지시를 받는 의료보조원 고시도 의협으로 이관되었다. 
제6대 분과학회협의회 회장으로 선출
이 박사님은 1972년도 4월 제6대 분과학회협의회 회장으로 선출된 후 1994년까지 23년 동안 9대에 걸쳐 회장을 역임했다. 제6대 회장 선출 후 당선사례에서 이 박사님은 “의학계에 당면문제가 산재해 있는 시기인 만큼 무엇보다도 우선 학회가 육성되고 커나갈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서슴지 않고 해볼 계획이다”라고 소견을 피력했다. 
이를 위해 이 박사님은 일차적으로 전문의자격시험 업무 이관 확정사업을 추진했다. 의료 선진국에서는 전문의에 관한 모든 시험업무가 전문 과목에 해당되는 사람들로 편성되어 자치제의 형태를 취하는 실정이었으나, 당시 우리나라는 전문의와 관이 양립해서 관장하는 불합리한 모순을 빚고 있었다. 법제처는 회부된 개정안에 대해 제1조 시험시행기관을 신설, ‘의사, 치과의사 전문의자격시험은 국립보건연구원장이 정한다. 다만 보건사회부장관이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에는 의료법 제58조 규정에 의한 의사회 및 치과의사회장에게 위임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이 개정안은 1972년 10월 보사부령 504호로 공포되어 법적조치가 완료되었으며, 이후 관에서 취급하던 시험사무가 민간단체에 이관된는 관민 협조의 좋은 시범사례의 하나로 매우 고무적인 일이었다. 전문의고시실행위원장이었던 이 박사님은 전문의 고시가 공정하게 이뤄지도록 엄격하게 시험 관리를 진행하며 한국의 전문의제도 발전에 공헌했다.
회장 재임 시 이밖에도 개업의의 학술활동 및 보수교육 강화를 위해 서울시의사회 분협 찬조금 지원을 이뤄내고, 각종 의학강좌를 마련하고 전문의 보수교육 강화 방침을 마련했다. 1974년 우리나라 의학을 해외에 널리 소개하고 상호 의학지식을 교환하여 우리나라 의학 발전을 도모하고자 의학영문 초록심의를 위한 학술편집위원회를 구성, 영문판 <한국 의학 초록집>을 발간했다. 이는 제4집부터 대한의학협회 사업으로 해마다 진행되었다. 또한, 1976년 의학용어 제정심의위원회를 구성하고 <의학용어집> 발간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1984년에는 대한임상병리학회 독립을 추진, 승인받으며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진료와 질적 향상을 도모하고, 임상병리분야에 전념할 수 있는 전문의육성 양성하는데 힘썼다. 1986년 6월은 가정의시험제도를 도입하시어 처음으로 가정의자격증시험을 시행하고, 정착화 시켰다. 
이처럼 이 박사님은 의학발전에 조금이나마 공헌하겠다는 생각으로 여러 가지 사업을 진행했는데 그 중 하나가 앞서 언급했듯이 졸업 후 실시되는 교육의 하나인 전문의제도 개선 및 의과대학생 교육의 개선이었다. 전문의 시험을 비롯한 여러 제도적 문제는 어느 정도 개선되었으나 의대생들의 undergraduate 교육은 전문의 교육에 비해 지나치게 뒤떨어졌다 생각하여 적극적인 계획을 추진했다. 1977년 12월 <의사국가시험의 문제점과 개선>을 주제로 한 세미나 개최를 시작으로 1987년 9월 의사국가시험 전담기구 설립 논의를 거쳐 1988년 12월 국립보건원에서 개최된 의사국가시험위원회에서 법인체 설립 계획안이 심의 통과되었다. 이로써 보건의료인국가시험이 민간기관으로 이관되었으며, 이 후에도 의사 국가시험원 원장을 역임하며 국가시험의 다양한 경험과 노하우를 바탕으로 선 국시 후 인턴시험 실시를 확정, 의사국시 과목 단일화를 추진함으로써 오랜 여망이었던 보건의료인 국가시험의 질적 향상 및 제도 발전을 이룩했다.
독일십자공로 대훈장 수훈
이 박사님은 1995년 8월 민간인으로서는 최고로 영광스러운 독일연방공화국 십자공로대훈장을 수상했다. 이는 한독의학회 창립, 한독협회 간사, 한국 훔볼트 회장 역임 및 대한의학회 주관의 분쉬 (Wunsch) 의학상 제정 등 한국과 독일 간의 이해 증진 도모에 끼친 공로를 인정받은 결실이었다.
의학교육의 혁신을 이루었던 아산재단 의료원장시절
이 박사님은 1977년 7월 말부터 아산사회복지재단 자문을 시작하면서 아산재단과 깊은 관계를 유지했는데, 서울대를 정년퇴임 후에는 서울중앙병원 초대원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아산복지재단은 1977년 현대건설 창립30주년을 기념하며 설립이 이뤄졌다. 주식의 50 퍼센트를 투자하여 의료인 양성, 의학연구소설립, 의료봉사, 사회복지사업, 장학사업 등을 지원할 것을 목적으로 했다. 이 박사님은 ‘돈의 가치는 그것을 소유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용하는데 있다 (The worth of money is not in its possession, but in its use)'는 격언에 따라 정주영회장의 사회복지재단 설립 결심은 바로 ’가진 자‘의 윤리성을 과감하고 획기적으로 실천한 본보기였다고 생각했다. 
이 박사님은 1977년 12월 재단으로부터 서울중앙병원 건립을 제안 받았다. 의료자문이었던 이 박사님은 해외 현황을 파악하기 위해 2회의 해외출장과 계속적인 해외자료 수집을 통해 시설계획 및 설계 담당 프로젝트에 진행했다. 병원 전산화 및 병원 운영계획을 구체화 시키고, 교육부로부터 의료인 양성을 위한 의예과를 신설 허가를 성사시켰고, 이에 병원에 의과대학 설립을 전제로 교수진, 학생들을 위한 공간을 마련했다. 
이 박사님은 1988년 3월 초대원장에 취임한 후 의학의 선진화 추구를 위해 캘거리대학의 교과과정을 분석하고, 이 제도를 도입했을 때의 문제점과 실험·실습기자재 등을 비롯한 통합교육 코스별 subcommittee를 구성하여 그 책임자를 선정하는 문제, 학점배당 문제 등을 모든 내용을 철저한 토의를 통해 결정했다. 또한 의료요원, 재미의사, 교수요원 등 중요 의료진의 섭외를 위해 신중을 기한 결과, 1989년 1월 전 직원이 참석한가운데 시무식을 하고 병원업무를 시작했다. 
이 박사님은 2년간의 임기를 마치고 정주영 이사장의 권유로 5개의 아산재단 지방병원을 관리하는 의료원장을 역임하며, 시간적 여유가 생기면 원장 활동으로 많은 시간을 내지 못하였던 대한적십자사 보건담당 부총재 일을 보기도 했다.
동병상련
정년퇴임 후 이 박사님은 크고 작은 병치레로 입원도 하시고 수술도 받았다. 일반 사람들은 의사라면 건강에 관한 지식을 알고 예방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며 건강을 지키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한 것 같다. 
이 박사님은 1960년대 초 국제원자력기구의 지원을 받아 연구에 몰두하고 있을 당시 심한 복통으로 응급실에 실려가 급성췌장염 진단을 받은 적이 있는데, 처음 병원에 입원하며 “내가 모르는 병원에 왔다면 모든 것이 신속하고 순조롭게 처리되었을까”하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이러한 경험은 의사라는 입장에서 환자로 입원해보지 않고는 환자를 이해하기 어렵다 생각하고 의사가 환자들에게 어떻게 대할 것인가 돌아보시는 계기가 되었다고 하며, 이후 금연금주를 결심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서울대를 떠날 때까지 건강에 자신하며 1년에 한두 번 위 투시를 해보기만 하며 이 박사님 자신의 건강 체크를 소홀히 하셨다. 1991년 적십자 일로 대한적십자사 행사를 참석하고 여러 혈액원을 방문한 후 광주 숙소에 도착하였는데 피로감이 아침까지 이어지고 방향감각과 어휘구사에 문제를 보여 다시 병원을 방문하여 검사를 통해 일과성 허혈발작 (TIA) 또는 뇌경색 초기증상이 의심으로 바로 서울대병원으로 이동했다. 여러 검사와 처치를 통해 실어증으로 진단받고 난 후 의료진들의 정성스런 치료를 통해 증세는 완화되었다. 
1997년에는 온몸이 심하게 쑤시고 오한이 심해저 말라리아를 의심하며 병원을 찾아 급성신우신염을 진단 받고 치료하였다. 입원치료 중 며칠간 미열이 계속되었는데 미열은 웬만한 고열보다 좋지 않은 기분을 느끼고 과거 미열로 고생하던 환자를 떠올리게 하였다고 한다. 이후 퇴원해 곤지암에 있는 따님 집에서 요양을 하며 ‘삶과 죽음이란 과연 무엇인가’ 하는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사색에 빠지시곤 했다고 한다. 건강의 회복하시고는 남은 생을 덤으로 여기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더욱 열심히 일하셨는데, 이후에도 뇌경막하혈종으로 수술까지 받았고, 만성육아종성염증 결핵성을 폐암으로 오진 받았지만 다행히 결핵으로 판명되어 우상엽절제술과 흉관 수술을 통해 회복했다.
이 박사님은 몇 차례의 입원으로 환자들의 불평불만을 되짚어 생각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환자들은 이해와 자세한 설명을 바라지만 사실 제대로 답해주지 못할 때가 많은 상황에서 약해질 대로 약해진 환자들의 희망은 오로지 의사나 간호사에게 있다는 생각에 항상 친절한 태도와 배려를 실천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박사님은 이를 통해 후배들에게도 “환자들은 의료진의 친절한 말 한마디와 최선을 다하는 자세에서 위로를 받고 고마움을 느낀다”며 환자들에게 무의미한 굴욕감이나 필요 없는 고통을 주지 말아야함을 강조했다.
이문호 선생님의 칼럼
칼럼 내용을 일부 참조하여 선생님의 글을 그대로 인용했다.
아호 靑峰에 대하여
특별히 아호를 갖고 싶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그런데 1961년에 3·1문화상을 계기로 주변의 권유로 ‘청봉’이라 지었다. 글자 그대로 항상 푸른 봉우리처럼 청정하고 싶어 그렇게 지은 것이다.
몸도 늙지 않고 연구에 대한의욕이나 모든 인생의 수업이 항상 줄기차게 솟아오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그러나 지금생각해보면 내 마음뿐이 아니었나 하는 아쉬운 생각도 든다.
주면에서는 ‘청봉‘이라 부르면 부를수록 싱그러움과 낭만이 깃든 이름 같지만, 가만히 몇 번이고 곱씹어 글자를 새겨보면 낭만 이전에 분화구의 용암 같은 뜨거운 ’야망‘이 샘솟는 것 같다는 말도 한다. 그 동안 아호를 늘 사용하지 않고 클럽 활동이나 수필동인집 발간할 때만 이름으로 대신했다. 어쨌든 열정이 느껴져 맘에 든다.
의학도에 관한 몇 가지 견해
우리나라 학자들에게는 일선에서 너무 빨리 은퇴하게 되는 조로현상이 있는 것 같아 때때로 안타까울 때가 있다. 회갑이면 심적으로 이미 늙었다고 느껴 그 전보다 모든 면에서 순발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이런 때일수록 마음을 한번 가다듬어 자신의 일에 더 적극성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의학이란 학문은 안이한 정신과 자세로는 넘볼 수도 없는 학문이지만 우물쭈물하다가는 늘 우물 안 개구리 격을 면하기 힘들다.
의사는 좀 거창하게 말하면 인류의 생명을 다루는 직업이므로 잠시도 게으름을 피울 수 없는 직업이라고 생각한다. 또 의학은 다른 학문과는 달리 인생을 건 모험이요, 투쟁이며, 자기와의 끝없는 대결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단시일 내에 무엇을 얻겠다는 생각은 절대 금물이다. 요즘엔 대학의 연구실 불빛이 일찍 꺼지고 젊은 의사들이 선생님보다 먼저 퇴근하려는 풍조가 만연한데 그 점 또한 자성해야한다. 예전엔 숯불에 유리접시를 달구며 실험하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이런 과거에 비하면 꽤 연구해 볼만한 여건이 되었는데도 게을러서 못한다면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일생동안 부단히 노력해도 모자라는 것이 학문인 것이다.
의사의 평생교육
의사가 된 지도 벌써 30년이 가까이 되었으니 그동안 내손을 거쳐 간 환자도 몇 만 명에 이를 것이다. 과연 그 사람들의 진맥을 제대로 했는지, 고통을 덜어주고 병을 치료하는데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 환자를 대할 때마다 늘 걱정이 앞선다. 
항상 배우려고 노력하는 성실한 의사를 알아주는 사회가 되어야만 의사도 늘 새로운 의학지식을 습득하려도 노력할 것이며 따라서 정당한 진료를 받게 될 것이다. 권위니 박사니 전문의니 하는 따위의 간판만 가지고 환자를 대할 때는 이미 지났다. 대학 졸업 후 5년이 지나면 이미 낡은 의학지식이 되러버릴 만큼 의학이 일진월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최근 들어 의사들의 소위 평생교육이 전 세계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다. 
북한산 有情
예년에 없었던 무더운 더위도 자취를 감추고 산들바람이 불어오는 9월의 마지막 토요일 오후였다. 의대 산악부의 ‘랜턴파티’에 참가하러 모여든 본과 의예과 학생 서른 명쯤과 같이 전세버스로 목적지인 북한산성을 향해 떠났다.
오랜만에 학생들과 무릎을 맞대고 그네들의 입김을 쐬어가며 그네들이 무엇을 고민하고 있는가를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이날까지 나는 소위 교수로서 그네들에게 무엇을 할 수 있었으며 또 무엇을 해주었던가 생각할 때 너무 나 자신이 학생들에게 무관심 했구나 하고 반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희랍시대의 아카데미는 아니더라도 침식을 같이하며 적어도 1년에 한두 번은 학생들과 만나 학생들의 가슴속을 살피고 그네들의 고민을 이해하고 살과 피가 될 수 있는 한두 마디라도 해주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닐까? 이런 시간이 강의실이나 병실에서 형식적으로 떠드는 것보다 몇 십 곱절의 효과가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나는 이날까지 이런 모임을 자주 갖지 못하였던 것을 한으로 생각한다. 
고 이문호 박사님의 학자로서의 열정은 떠나시기 얼마 전까지도 책을 가까이 하며 새로운 의문을 떠올리던 모습으로도 느낄 수 있다. 평생토록 잠시도 쉬지 않고 학문과 의료발전에 열중하였던 박사님, 엄하시지만 따뜻한 마음으로 후배들을 헤아려 주고 학문의 길을 깨우쳐주던 박사님은 언제나 늘 원하였던 것처럼 후학의 ‘영원한 거울’로 존경받았던 '큰 스승’이었다. 
이 모든 위대한 업적을 이룬 이 박사님 뒤에는 늘 말없이 내조한 사모님의 공로와 가족의 사랑이 있었다. 박사님께는 송귀순 여사님과 영원 (㈜경일 대표)·영열 (한양대 의대교수)·영익 (LG전자 부장)씨 등 3남 1녀가 있고 4남 1녀의친손과 1남 1녀를 외손이 있다. 
이문호 박사님, 박사님 삶을 회상하며 고귀한 뜻을 간직하겠습니다. 편안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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