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학부] 故 최형섭 박사 회상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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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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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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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서상희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최형섭 박사님의 학창시절 이야기
최형섭 박사님은 1920년 11월 2일 경남 진주에서 지환공의 차남으로 태어나셨다. 최 박사님은 이미 어렸을 때부터 남달랐다. 대전중학교 (현 대전고등학교) 동기동창인 신응균 (예비역 육군중장/전 한국과학기술연구소 부소장)씨에 의하면 학창시절 처음 최 박사님의 집에 놀러 갔을 때 그의 방안에는 당시에는 상상할 수도 없는 각종 기계 모형이 있었고 책장에는 ‘어린이의 과학’이라는 처음 보는 과학월간지가 꽉 차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집안의 창고 안에는 학교와 비슷한 규모의 화학실험실이 꾸며져 있었다 한다. 남달리 부유한 집안 환경 탓에 가능하였겠지만 어렸을 때부터 과학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음을 알 수 있다.
법과를 택하기를 바라마지 않았던 선친을 설득하여 1939년 일본 와세다대학교 이공학부 채광야금과 (공학사)에 진학하시고 1944년 졸업 후 귀국하여 조선광업주식회사를 거쳐 해방 후 1946 경성대학 이공학부 광산야금과 교수로 부임하셨다. 1953년 미국 유학길에 올라 1955년 노틀담대학교에서 물리야금학 석사, 1958년에는 미네소타대학교에서 화학야금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박사학위를 미네소타대학교에서 받은 사유를 보면 그 분께서 시대를 내다보는 탁견과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얼마나 컸는가를 알 수 있다. 최 박사님은 1955년 노틀담대학교에서 X-선결정학의 대가이신 칼리티 (B. D. Cullity) 교수의 지도하에 물리금속학 석사학위를 마쳤다. 당시 물리금속학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장학금이 유일하게 나오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최 박사님은 당시 우리나라에 당장 필요한 기술은 제련공학이라고 판단하고 이를 공부하기 위하여 미네소타대학으로 자리를 옮겨 박사학위 과정을 밟으려 하자, 칼리티 교수가 “여기서 앞으로 2년만 더 고생하면 금속의 소성변형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을 수 있을 텐데 왜 분야를 바꾸어 다시 시작하느냐”고 극구 말렸다. 하지만 최 박사님이 우리나라 사정을 설명하고 그 필요성을 역설했더니 나중에는 기꺼이 자기 모교인 미네소타대학에 추천하여 연구장학금을 받도록 주선해 주었다고 한다. 세계적인 대가 밑에서 보장된 개인의 명예와 출세보다는 좀 힘들더라도 당장 나라에 필요한 연구를 해야 한다는 박사님의 신념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학문적 업적
최형섭 박사님은 생전 저서 13권과 학술논문 120여 편을 남겼다. 그리고 국민훈장 무궁화장, 대통령상 발명상, 제1회 한국공학기술 대상, 국회 과학기술연구회상 특별상, 프랑스 국가공로훈장, 일본 닛케이 아시아상 등을 받았으며 2003년에는 ‘한국과학기술행정의 기틀을 세운 금속학자’, 국립서울과학관의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오르기도 했다. 최 박사님의 업적을 학문적인 면과 과학행정적인 면으로 구분하여 그 큰 줄거리만을 살펴보면 연구 분야는 금속공학전반에 걸쳐 기초에서 응용·개발 및 제조연구에 이르기까지 실로 광범위하고 그 업적 또한 국제적으로 높이 평가를 받고 있다. 비단 금속공학분야 뿐 만 아니라 과학기술개발정책 및 연구관리 분야에 있어서도 많은 논문을 발표하여 국제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최 박사님은 학문적으로 보통 사람으로는 이루기 참으로 어려운 놀라운 성과를 이룩하셨다. 학문의 폭과 깊이와 넓이에 있어서 범인 (凡人)은 상상하기에도 벅차고 대단한 것이다. 기초연구에서부터 응용연구에 이르기까지 연구를 해서 거의 모두가 세계적인 연구결과를 얻는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거의 불가능한 일이지만 이를 가능케 한 것은 최 박사님의 높은 이상과 굳은 의지, 학문에 대한 열정 그리고 학문적 성취의욕과 목표달성을 위해 지독한 집념을 가지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최 박사님이 몰두하신 연구 분야를 세분하면 계면현상과 부유선광이론, 습식야금, 금속재료의 기본적 특성, 초내열합금의 개발, 고급강의 제조 및 과학기술개발정책과 연구관리 등이다. 최 박사님의 학문적 업적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부유선광 분야의 최고상인 리차드 (Richard) 상을 받은 미국 미네소타대학의 쿡 교수의 수제자로서 고체와 액체간의 계면현상을 전기화학적으로 구명하고 이를 부유선광이론에 적용하여 철광석을 비롯한 비황화광물 부선에 대한 새로운 학설을 제안함으로서 당시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특히 철광석의 역부선법개발은 미국 미네소타 북부의 거의 버려두다시피 했던 수십억 톤의 저품위 철광석을 활용할 수 있는 획기적인 일대 전기를 마련했다고 한다.
1959년 미국에서 귀국하시자마자 이 새로운 학문을 처음 도입하여 후학들과 더불어 연구를 꾸준히 발전시켜 많은 논문을 국내외 학술지에 발표했다. 특히 1962년부터 착수한 결정구조가 계면현상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는 최 박사님이 최초로 착안하여 수행한 것으로 이후 이 방면에 대한 연구가 국제적으로 집중된 것으로 보아 최 박사님이 개척자적 역할을 했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최 박사님의 크신 업적은 당시 국제적으로도 높이 평가를 받았다. 캘리포니아 대학교의 휴스테나우 (Fuerstenau) 교수가 부선법 출현 50주년을 기념하여 미국금속학회 (AIME)에서 출간한 이 분야의 교과서라 할 수 있는 ‘Froth Flotation"의 제7장 중 산화철 부분은 최 박사님의 업적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또한 휴스테나우 교수가 가우딘 (Gaudin) 상 수상 시 기념강연에서 최 박사님의 업적을 특별히 강조한 것으로 미루어 그 중요성을 느낄 수 있다.
그밖에 렘리치 (Lemlich) 편저의 ‘Adsorptive Bubble Separation Techniques’이나 ‘Chemical Reviews’에도 최 박사님의 업적이 상세히 소개되어 있다. 일본 도호꾸대학의 下飯扳 교수는 일본광학회지를 통하여 최 박사님의 독창적인 연구업적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이후에도 최 박사님의 연구결과는 Ⅻth International Mineral Processing Congress 및 52nd Colloidal and Surface Science Symposium 등 각종 국제학술대회에서 널리 인용되고 있음을 볼 때 그 공헌이 얼마나 크셨는가를 알 수 있다.
최 박사님의 연구업적 중 지르코늄사로부터 금속지르코늄 추출에 대한 연구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금속지르코늄은 원자로를 만드는 중요한 재료로 쓰이고 일부 특수강에 매우 중요한 첨가원소로 사용되고 있다. 최 박사님은 우연히 국제원자력기구 (IAEA)로부터 금속지르코늄 추출의 새로운 개발방법에 대한 연구제의가 들어왔을 때, 당시 국내에 지르콘사가 상당량 부존되어 있다는 사실을 중시하여 이에 대한 일련의 연구를 위해 1963년 원자력연구소 소장직을 그만두고 캐나다의 알버타대학교 엘도라도 연구소로 들어갔다. 여기서 유의할 점은 오로지 연구를 위해 원자력연구소 소장직이라는 명예와 실익에 안주하지 않고 기득권을 과감히 포기하였다는 점이다. 이 연구를 위해 최신 X선 분석장치가 있는 오타와의 에드민튼 광업제련 중앙연구소에서 실험을 했는데 이곳은 겨울철의 온도가 영하 25가 넘는 곳이었다. 이때에도 최 박사님은 언제나 밤 12시가 지나서 귀가했다고 한다. 아무튼 이러한 환경에서 지르코늄 추출에 관한 연구가 진행되었고, 그 결과 알카리 프릿팅법 (Alkali Fritting Process)이라고 하는 세계 최초의 새로운 제련법 개발과 함께 추출과정의 반응이론을 구명했다. 지금도 같은 과학자로서 그 당시 최 박사님이 수행하신 연구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치밀함과 창의성 그리고 다양한 실험내용에 경이로움을 느낄 정도이다. 알카리 프릿팅법은 5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활용되고 있으며 Ilmenite, Monazite 등 다른 광물의 제련에도 적용하고 있어 그 파급효과가 매우 크다고 하겠다. 이 연구가 성공적으로 수행됐을 때 엘도라도연구소 측은 최 박사님의 탁월성을 인정하여 연구소 부장으로 일해 줄 수 있겠느냐는 당시로서는 생각할 수도 없는 아주 파격적인 제의를 했으나, 그 때 최 박사님의 꿈은 어떻게 하든지 우리나라에 세계적인 과학기술연구소를 만들어 보겠다는 것이었기에 그러한 제의를 정중히 사양했다고 한다.
최 박사님은 선광, 습식분야 이외에도 금속물리 분야의 기초이론을 비롯하여 금속재료의 개발, 제조 등 실로 불가능할 것 같은 넓은 분야에 걸쳐 많은 업적을 쌓으셨다. 이론연구는 미국 노틀담대학에서 당시 X선결정학의 세계적인 권위자인 칼리티 (Culity) 교수와 함께 진행했으며, Ag 및 Mg 단결정의 비틀림 변형에 대한 연구는 당시 금속소성변형에 대한 새로운 이론을 정립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밖에도 우리나라에 도입, 설치된 원자로를 이용하여 중성자조사에 의한 금속특성의 변화에 대한 기초연구도 이룩했다.
당시 금속소재로서 중요성을 더하고 있었던 구상화흑연주철에 있어서 흑연의 구상화기구에 대해서는 정설이 없는 상황에서 최 박사님은 용융철과 흑연간의 계면에너지가 중요한 구실을 하리라는 독창적인 착상아래 새로운 흑연의 구상화기구 이론을 전개하게 되었고, 금속가공분야에서는 폭발가공법을 비롯하여 열간 압출에 의한 파이프제조연구를 수행하여 금속가공법 발전에 기여했다. 또한 우리나라 유일의 자원이라고 할 수 있는 텅스텐 자원을 활용할 목적으로 기초적인 분말의 소결법 연구에 의해 당시 대한중석에 의한 분말야금사업을 이룩케 한 기틀을 마련하기도 했다.
또 하나 빠트릴 수 없는 것은, 최 박사님의 성품과 능력을 익히 알고 있는 일본 와세다 대학의 옛 학우들이 최 박사님의 KIST 소장 취임을 축하하며 대형 전자현미경을 기증했는데, 이를 계기로 최 박사님은 전자현미경을 이용한 Ni기 초내열합금에 대한 소성변형, 석출물의 결정구조, 석출물의 성장이론 및 철합금에 있어서 AlN의 성장속도를 구명하는 등 전자현미경을 이용한 기초적인 연구에 이어 본격적인 내열합금개발연구에 착수하여 고가의 합금원소인 Ni을 값싼 Mn으로 완전히 대체한 새로운 고망간 내열합금을 개발해냈다. 이 합금은 Fe기 초내열합금의 대표적인 합금인 N-155보다 고온특성 및 내식성이 훨씬 우수한 합금이다.
이후 최 박사님이 세우고 적극 지원한 바 있는 KIST 특수강연구실에서는 새로운 Ni기 초내열합금 및 텅스텐 활용을 위한 고텅스텐 초내열합금개발에 대한 연구를 지속한 결과 KM 1557 등 세계최강의 초내열합금의 개발에 성공했다. 특히 과기처장관으로 재임하시면서도 우리나라 산업의 고도화를 예견하여 고급공구강이나 내열합금 등 소재제조연구의 필요성을 깨eke고 이의 지원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또한 최 박사님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당시 특수강연구실 연구원이었던 필자들은 국내 최초로 일렉트로슬랙재용해법 (ESR법)에 대한 연구에 참여하여 실험규모와 공업규모의 ESR 제작과 이를 이용한 특수강 정련기술 개발에 성공했다. 이 기술개발의 중요한 경험은 후에 당시 한국중공업 (현 두산중공업) 원자력발전소 발전기용 로타의 제조를 위해 미국의 콘삭 (Consarc)사로부터 88톤 규모의 초대형 ESR로를 도입할 때, 당시 실무자가 KIST와의 공동연구 경험을 바탕으로 미국회사가 제시한 상세사양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구입가를 대폭 삭감함으로서 투입한 연구비의 수 십 배에 달하는 외화를 절약하는 큰 성과를 이루어내기도 했다. 당시 최종계약을 위해 내한한 콘삭사의 사장은 “그 때까지 전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자신들이 제조하는 기계장치 사양의 문제점을 지적한 적이 없었다”며, “도대체 그러한 미묘한 기술적 사항을 어떻게 알아낼 수 있었는가”라고 경탄을 금치 않았다고 한다. 그 이후로도 장치의 운용 중 기술적인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들에게 휘둘리지 않고 주도적으로 기술지원을 받게 되었고 나아가 세계 최고 품질의 원자력발전 발전기 로터의 제조에 성공했다. 이 사례를 통해 자주적인 연구개발의 중요성이 얼마나 큰지와 그 중요성의 또 다른 측면을 깨닫게 된다. 또한 국내 최초로 항공적하로 쓰이는 마레이징강을 VAR법으로 재정련하는 연구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과학기술행정가로서의 업적
최형섭 박사님은 여느 과학자와는 달리 과학행정에 대한 투철한 이념을 가지셨고, 그 수완이 탁월하여 과학행정적 업적은 학문적 업적 이상으로 심대하다고 하겠다. 다음에 우리나라의 과학기술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준 최 박사님의 과학기술행정가로서의 업적을 살펴보기로 한다.
우리나라에 있어 최 박사님의 존재가 참으로 행운인 것은 나라의 미래가 좌우되는 매우 중요한 시기에 최 박사님과 같은 훌륭한 과학기술행정가를 배출했다는 것이다. 최 박사님의 크나 큰 업적을 논하기에 앞서 반드시 언급할 것은 그 분은 박정희 대통령이라는 위대한 영도자를 만남으로서 비로소 빛을 발하였다는 것이다. 한 분은 우리나라의 위대한 영도자로서, 한 분은 시대적 안목과 천재적인 실력을 갖춘 위대한 과학자로서 두 거인이 만나 뜻을 함께 함으로서 시행착오 없이 최단기간에 우리나라가 과학기술입국으로 일어설 수 있었음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최 박사님은 생전에 “박정희 대통령은 내가 과학기술정책에 관해 건의한 내용의 90퍼센트 이상을 들어주는 절대적인 후원자 역할을 했 때문에 그 모든 일이 가능했다”는 말씀을 하시곤 했다.
최 박사님은 1959년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끝내고 귀국 후, 한 때 국산자동차주식회사의 부사장으로서 자동차부속품 제작과 함께 국내에서는 최초로 소형자동차 제작에 대한 구체적인 세부계획을 마련할 때부터 자신의 온 정열과 정성을 과학입국에 쏟기 시작했으며, 그 때 훈련된 많은 과학기술자들이 후에 이 분야 핵심멤버로 성장하여 국가발전에 많은 기여를 했다.
그 후 원자력연구소 일급연구관으로 원자로재료 개발에 진력하시고, 정부의 요청으로 상공부 광무국장을 겸직하면서 최초로 종합제철건설에 관한 기본계획수립에 착수함으로써 포항종합제철의 산파역을 담당했고 오늘날 제철강국의 바탕을 마련했다. 곧 이어 1962년 원자력연구소장직에 오르면서 원자력발전 15개년계획을 수립, 현재의 원자력 발전의 기틀을 닦았으며, 연구용 원자로 TRIGA Mark Ⅱ를 가동케 하여 원자력사업을 본 궤도에 올려놓았다.
최 박사님이 자신의 행정 철학을 구체적으로 실현한 대표적 업적으로 인재양성을 들 수 있다. 당시 취업이 어려웠던 서울대 원자력공학과 1회 졸업생들을 대거 연구원으로 영입했고, 공군 기술하사관 약 40여명을 기능직으로 채용하여 연구소의 기술수준 향상에 기여하게 했다. 또한 취업이 어려운 공대생들은 연구원으로 채용하고, 예산의 부족분을 수위와 청소비 등의 잡비를 줄임으로써 연구원에 대한 하숙비 등으로 지불하게 했다.
끊임없이 용솟음치는 최 박사님의 학구열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당시 대학에 산재되어 있던 석학들의 연구능력을 규합하고 활성화시키는 동시에 자율성 있게 연구를 수행토록 금속연료종합연구소를 창설함으로써 거의 불모상태에 있던 금속제련 분야에 선각자적 역할을 했다. 이 연구소는 대한중석, 한국광업제련공사를 비롯한 여러 회사가 연구비를 공동으로 출연했으며, 각 회사가 필요로 하는 연구개발을 전담케 했는데, 이는 우리나라 연구조합의 효시라고 할 수 있으며 산학협동의 첫 시범사례이기도 하다. 이 때 연구소는 연구원들이 거의 대부분 대학교수들과 대학원생들로 구성되어 있어 낮에는 학교에서 강의를 하거나 수업을 받고 연구소로 다시 모여 연구함으로써 연구가 주로 밤에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어서 최 박사님이 생전에 항상 역설하시던 ‘밤에도 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소’가 되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최 박사님을 구심점으로 한 젊은 연구자들의 일사분란한 집중연구는 많은 연구업적을 남겼으며 수많은 유능한 연구자들을 양성해 냈다. 당시 연구원들은 하나같이 훗날 학계와 연구계를 이끌어가는 중추적인 대들보로 성장했다.
금속연료종합연구소의 발족 당시 세 가지 특징은 첫째, 순수한 민간연구기관으로서 효율적인 운영체제를 갖추었다는 것이고 둘째, 연구소의 문을 젊은 후진들과 대학의 유능한 연구자들에게도 활짝 열어 놓음으로써 진정한 의미의 산·학·연 협동연구의 길을 열어놓았다는 점이며 셋째, 생산과 직결되는 연구기관으로서 수탁연구제도가 제정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특징은 KIST 설립에 대비한 사전검토를 위해 내한한 바 있던 미국대통령 과학자문 일행이 이 연구소를 살핀 후 “한국에 서의 공업연구기관 설립의 타당성을 확신하게 되었다”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금속연료종합연구소의 운영이념과 관리방안은 이후 설립된 KIST에 대폭 반영되었는데, 이러한 관점에서 이 연구소는 KIST를 위시한 우리나라 공업연구기관의 모체라고도 할 수 있으며, KIST의 발족과 더불어 이 연구소가 KIST에 발전적으로 흡수된 것도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1966년 2월 KIST가 설립됨에 따라 최 박사님은 초대 소장이 되었고, 이어 KIST라고 하면 곧 최 박사님을 연상하리만큼 그 분의 꿈을 마음껏 펼친 눈부신 활동의 시대가 전개되었다.
최 박사님은 연구소 예산과 제도 등, 외부 환경적 문제는 최고 정책결정자인 박정희 대통령에게 의존해 해결하면서 연구소의 내부적인 문제들을 적극적으로 해결해그림 . 박정희 대통령이 최형섭 박사에게 한국과학기술연구소장의 임명장을 수여하고 있다. 나갔다. 대표적인 예로서 KIST 설립을 박정희 대통령의 절대적인 신뢰 하에 일을 추진해 나간 것을 들 수 있다. 또한 연구중심의 연구소 운영 방침은 KIST 소장시절의 대표적인 행정운영 방식으로 나타났다. 초대 KIST 소장으로 부임한 후, 특히 과학기술 행정의 관료주의적 경향을 혐오하여 연구소의 자율성을 확보하는 데 주력했다. 최 박사님은 개발도상국의 경우 연구지원 행정에 있어 관료의 무능력과 부패가 권위주의적인 형상으로 표출될 때 효과적인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즉, 과학기술 행정조직이 연구개발의 지원이라는 목표보다는 연구개발 과정을 관리하고 감독하는 수단에 치중하게 될 때 수단과 목표의 전치 현상이 나타나 형식적인 연구 활동에 그치게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조직의 운영측면에서 조직외부의 문제는 환경적 변수를 최소화하고 폐쇄시킴으로써 해결했고, 조직 내부의 문제는 조직 구성원들에게 조직목표 수행을 위한 철저한 동기부여를 통해 조직의 효율성 향상을 추구하고자 했다. 따라서 이를 수행하기 위해 장관으로서, 또한 행정가로서 당시 최 박사님의 행위는 타협이나 절충을 통한 문제해결형이 아니라 원칙론에 입각해 저돌적으로 추진하는 스타일을 따랐다.
연구소의 운영체제설정에 계약연구 제도를 도입하여 사업의 적극적인 참여와 연구자의 책임 있는 업무수행이라는 공업연구추진의 기본자세를 확립시켰으며, 이로써 KIST는 발족 10여 년 만에 수 천 건의 계약연구를 수행하여 국가공업화에 크게 이바지 할 수 있었다. KIST의 운영이념은 타개발도상국 기술개발의 모범사례가 되었으며, 이른바 국제적으로 ‘Choi-Model’이라고 불리어지는 이 방식은 개발도상국이 그 나라 형편에 따라 선진국의 기술을 어떻게 수용·발전시키느냐 하는 문제해결의 성공사례로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최 박사님께서 KIST 재직기간 약 6년 동안 이룩한 연구기관의 자율성과 안정성을 존중하는 근대적 연구관리 방식의 확립과 함께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시행한 해외우수두뇌의 집단유치 등은 앞으로도 길이 기억되어야 할 것이며, 이후 속속 설립된 전문연구기관은 모두 KIST의 관리체제를 모델로 하여 구축되었다.
최 박사님은 1971년 6월에 과학기술처장관으로 취임하자마자 과학기술 행정의 주요 정책기조로 3대 기본방향을 설정했다. 국가발전의 기초를 과학기술 진흥에 둔다는 신념으로 제시한 정책의 기본방향은 ‘과학기술 기반 조성 및 강화, 산업기술의 전략적 개발, 과학기술 풍토조성’이었다. 먼저 과학기술 기반 조성 및 강화를 위해 과학기술 인력의 양성을 중요시했는데 특히 역점을 둔 부분은 고급 과학기술 인력의 양성이었다. 산업기술의 전략적 개발을 위해서는 기업이 기술개발에 의욕을 가져야 한다고 하며, 재무부와 협의하여 세제혜택 등 각종 정책지원 사업을 추진했다. 과학기술 풍토의 조성은 과학기술 대중화를 위해 전 국민의 과학화 운동 등을 통해 사회적으로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사고방식의 정착화를 추진해 나갔다. 이러한 정책기조는 1978년 12월까지 장관 재임 7년 반 동안 지속되었고, 모든 정책수립과 집행이 이 3대 목표를 중심으로 추진되었다. 이 세 가지 정책기조를 한번 바꾸어 보고하라고 일각에서 건의를 하자 최 박사님께서는 “이 세 가지가 가장 중요한 것이기에 일부러 바꿀 필요가 없다”고 했다 한다. 과학기술개발 3대 기본정책방향 설정에 따라 국가기술자격법, 기술개발촉진법, 기술용역 촉진법, 기술용역육성법, 특정연구기관육성법 등 10여개의 관련법령을 제정하여 과학기술발전의 토대를 마련하는 한편, 과학기술행정기구와 연구개발체제를 개편·강화했으며, 대학교수, 연구원, 현장기술자를 동원하여 국가가 요청하는 연구개발과제를 기초에서부터 응용·개발연구에 이르기까지 일관성 있게 수행하기 위해 한국과학재단을 설립했다.
이 외에도 80년대 고도산업사회에 대비하기 위해 고급두뇌인력의 양산을 위한 한국과학원 (현 한국과학기술원)의 설립과 육성, 기능의 정예화를 위한 기능대학의 설립 등, 다른 어느 나라에서도 그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연구개발 지원체제를 구축했다.
한편, 장관재임 시에도 종합연구기관인 KIST를 육성·발전시켰고, 이와 함께 각 분야에 걸쳐 전문연구기관 설립에 산파역을 맡아 대학을 포함한 연구소간의 유기적인 관련을 맺도록 KIST를 중심으로 한 서울연구단지, 대덕연구학원도시 건설을 창안하기도 했다. 이밖에 기업 스스로 기술개발을 적극 주도할 수 있도록 지원장치의 설정 등 우리나라 과학기술개발이 도약할 수 있는 기반을 견고하게 구축함에 있어 최 박사님의 신념과 열정 그리고 경륜이 스미지 않은 곳이 없다. 사실 이러한 일을 추진하는 데는 막대한 국가예산이 들어가므로 추진과정에서 한정된 국가예산을 확보하는데 수많은 반대와 난관이 있었으나 박정희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이를 모두 극복하고 이룩해 낸 것이다.
만약, 최 박사님이 만에 하나 조금이라도 사심이나 개인적 명예를 추구했다면 이런 엄청난 규모의 일을 성공적으로 추진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결국 이러한 최 박사님의 진심을 국가최고 통치자가 인정함으로써 때로는 예산적으로 무리하다 싶어도 종국에는 적극적으로 지원한 것이다.
한편, 최 박사님은 한 나라의 과학기술진흥은 과학에 대한 국민들의 이해와 관심이 바탕이 되어야 하며, 따라서 과학기술에 대한 지식과 교양이 국민의 인격형성에 중요한 요소가 될 때까지 과학지식의 보급과 과학사상의 앙양이 필요하다는 지론아래 전 국민의 과학화운동을 일으켰다. 이러한 과학기술풍토 조성을 거국적으로 꾸준히 추진함으로써 한 때 연구실과 강단의 전유물로만 여겨지던 과학이 전 국민들에게 생활화됨으로써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었던 것은 우리나라 역사상 일찍이 없었던 일이다. 
개발도상국을 위한 과학기술 개발정책과 교육 전도사 역할을 담당하다.
이와 관련, 최 박사님께서 미국에서 발표한 ‘Adapting a Developing Country to the Development of Adaptive Technologies’는 1975년에 발간된 유명한 단행본인 라비노비치 (Rabinowitch)저의 ‘Views of Science, Technology and Development’에 전문이 수록되기도 했다. 또한 1977년에 태평양과학회의에서 발표한 ‘The Role of Various Stages of Technology Relevant to Developing Countries’는 ‘Mobilizing Technology for World Development’라는 논제아래 자메이카에서 개최된 국제심포지엄에서 개발도상국 과학기술개발정책의 시범사례로 기재된 바 있다.
최 박사님은 이 분야에 대한 연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단행본인 ‘개발도상국의 공업연구’를 1976년에 출간했으며, 이 책은 일어로도 번역되어 크게 호평을 받았고, 영어, 중국어 심지어는 이란에서도 아랍어로 번역하여 고위관리들이 정독했다고 한다.
최 박사님은 국가과학기술정책의 설정과 개발계획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했고, 또한 많은 국제교류를 통해 여러 나라들의 과학기술정책 방향과 실천경험을 상호 비교 분석하고 검토하는 기회를 자주 가졌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최 박사님은 총 3부로 된 ‘개발도상국의 기술개발전략’을 1980년과 1981년에 저술했다. 이 책에서는 1950년 후반과 1960대 초에 우리나라가 처해 있던 환경과 여건 아래 어떤 계획들을 구상했고, 계획한 일들을 어떻게 실천했으며, 그 결과와 교훈을 회고록 형식으로 기술했다. ‘개발도상국의 기술개발전략’의 제 1부에서는 개발방향 설정의 일반론과 과학기술의 토착화를 위한 기반구축에 관하여 언급했다. 제 2부에서는 경제 발전에 필요한 산업기술문제를 다루었고, 제 3부에서는 발전도상에 있는 나라들이 선진 고도산업사회를 지향함에 있어 미리 대비해야 할 과학기술 개발대책을 제시했다. 제1부와 2부는 아시아생산성본부 (APO)에서, 제 3부는 UN 산하기관인 아시아․태평양 경제사회개발기구 (UNESCAP)에서 각각 영문으로 번역되었고, 이것은 다시 중국어와 이란어로도 번역되었다.
최 박사님께서는 우리나라 경제발전의 밑거름이 된 값진 연구개발 경험을 후진국들에게 전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라는 신념으로, 공직에서 은퇴하신 1980년 이후에도 끊임없는 후진국들의 초청에 열정적이고 희생적인 마음으로 그들의 과학기술개발 정책수립을 지도하고 지원했다. 또한 중국과 처음으로 과학기술교류 물꼬를 열었으며 기술 선진국 일본과 과학기술협력도 추진했다.
최 박사님은 아시아․태평양 경제사회개발기구 (ESCAP)의 40차 총회에서 이른바 도쿄선언 (Tokyo Programme on Technology for Development in Asia and the Pacific)의 줄거리를 만들었으며, 당시 ‘실천강령’ 초안은 이에 바탕을 두었던 것이다. 그 후 이 ‘실천강령’을 근거로 총 6권의 ‘개발도상국의 기술개발지침서’가 1986년부터 1988년까지 3년에 걸쳐 만들어졌으며 최 박사님은 이 과제의 자문위원장직을 맡은 바 바 있다.
1984년 APO 이사회에서는 급변하는 기술변화시대를 맞아 개발도상국의 경우 이에 대한 대응책 마련을 위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보고, 기초연구과제로 ‘기술변화시대의 생산성 증대를 위한 인적 측면의 역할’을 채택했으며 최 박사님에게 연구책임자를 맡겼다. 최 박사님은 이를 위해 14개 APO 회원국에서 2명씩의 연구 참가자를 선정하여 연구를 수행했고, 이를 통해 생산성 증대가 기술만이 관계되는 것이 아니고 ‘기술, 관리 및 조업’의 복합적인 노력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며, 관리와 조업은 인간이 하는 것이니 결국, 생산성 증대는 기술과 인간적 측면의 두 가지 요소의 복합화에 의한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연구결과보고서를 다시 다듬은 것이 1989년에 출간된 ‘기술과 인간의 복합화 (Hybrid of Man and Technology)’라는 책자이다.
최 박사님이 개발도상국의 기술개발정책 수립을 직접적으로 도와주신 예로서 가장 많은 기술협력을 제공한 태국의 경우를 살펴보자. 최 박사님은 태국 정부에서 1980년대 당시 입안하고 있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속에 과학기술개발 5개년계획을 포함하는 일에 대한 자문을 했다. 최 박사님은 이를 위해 태스크포스팀을 구성, 6개월간 밤낮을 가리지 않는 한국식 강행군 끝에 과학기술개발계획을 만들었다. 태국에서는 이 계획을 실천하는 법까지 지원해주기를 요청해 최 박사님은 과학기술진흥법, 기술개발촉진법, 국가기술자격법, 특정연구기관 육성법들의 초안을 만들어주었다. 또한 기술이전센터, 과학기술정보센터 설립에 대한 안과 투자개발계획도 만들어 주었다. 이렇게 애를 써서 만들어 준 과학기술개발계획은 초기에는 제대로 진행도 못했고 어떤 것은 반영이 되지도 못했으나 결국에는 10년이 지나 겨우 작동되기 시작했다. 결국 현재 태국의 과학기술과 경제 발전은 최 박사님의 자문이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하겠다.
이외에도 최 박사님은 스리랑카, 말레이시아, 미얀마의 최고지도자들을 만나 과학기술에 대한 자문을 해주었다. 이들의 공통적인 질문은 “어떻게 하면 자기 나라도 한국처럼 성공적으로 과학기술을 발전시킬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었으며 최 박사님은 그럴 때마다 “그 첫째는 과학기술이 국가발전의 최우선 과제라는 국가원수의 투철한 이념과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강력한 영도력이 필수적이며, 다음에는 능력의 배양과 배양된 능력의 조직화이고, 끝으로 이를 거국적으로 실천에  옮기는 과감한 추진력”이라고 답변했다.
최 박사님은 동남아를 비롯한 개발도상국과 경제협력을 강화하려면 눈앞에 보이는 상품수출이나 원료수입만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장래를 내다보고 기술 수출과 플랜트 수출에도 유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당시 일본이 상품 수출에만 치중했던 행태와는 크게 다른 것이다. 또한 최 박사님은 동남아 국가들이 발전하도록 도와 후진국에서 점차 벗어날 수 있도록 그 나라의 공업화와 이를 뒷받침하는 과학기술개발정책이나 계획을 마련하는 데 협력해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이를 자신이 쌓아온 경험을 바탕으로 몸소 실행했다. 즉, 이들을 진지하게 도와주고, 이와 관련된 기술수출을 도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이렇게 하면 자연스럽게 동남아시장을 개척할 수 있게 되고 원료개발수입과 기술수출과 플랜트 수출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를 보면 최 박사님은 모든 공직에서 물러난 둔 뒤에도 우리나라를 위해 크게 보아 동남아시아 국가들을 몸소 도와준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국민특성과 사정을 잘 파악하여 ‘신의와 이해’를 바탕으로 장기적 안목에서 상호이익을 위한 공동체 형성에 노력해야한다고 생각했으며, 상품이나 사업에 관한 협력에 선행하여 먼저 과학기술적인 측면에서 협력의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 더욱 바람직한 방향이라고 판단한 것이었다.
최 박사님은 이슬람 국가들에도 과학기술개발전략에 대한 도움을 주었으며 이슬람 국가와 우리나라의 기술개발협력을 확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는데, 요르단, 이집트,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파키스탄, 심지어 방글라데시의 과학기술개발정책 등에 대한 자문을 하기도 했다. 특히, 사우디아라비아 국립과학기술개발센터 (SANCST)가 KIST와 협력관계를 맺도록 했으며 장기발전전략을 세우는데 도움을 주었다. 구체적으로는 “15년 정도의 청사진을 그려놓고 이를 대상으로 5개년 개발계획을 작성하여 매년 집행해나가는 실천계획을 만들어야 하고, 이러한 계획들을 관리하는 계획도 마련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를 계기로 하여 KIST와 SANCST는 이른 바 푸른 사막사업 (Project Green Desert)라는 이름의 기술, 경제 타당성 조사사업을 위시해 전산업무 기술지원, 연구결과 공업화 타당성 검토 등 여러 가지 협력을 추진하게 됨으로써 KIST는 이 사업으로 1981년 당시 19억 원의 용역고를 올리는 계가를 이루었다.
최 박사님은 장관 퇴임 후, 한․일 21세기 위원회에도 꾸준히 참여하여 한․일간 과학기술 교류를 증진시키도록 많은 노력을 했다. 한․일 21세기 위원회란 1988년에 개최된 한․일 정상회담에서의 합의에 따라 설치된 것으로, 21세기를 향한 장기적인 전망과 범세계적인 시각에서 한․일 양국의 건설적인 동반자 관계를 구축하기 위한 방안을 검토하고 양국 국민간의 상호이해와 보다 결실 있는 대화증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1990년까지 5차례 열린 동 위원회에서 최 박사님은 과학기술분야 책임을 맡아 21세기를 향한 한․일 양자간 협력과 다자간 협력문제를 논의했다.
최 박사님은 이 위원회에서 한일 간 동반자적 협력관계와 상업적 기술협력관계의 강화를 주장했다. 공공기술협력분야로서는 한국에 신소재특성평가센터를 설립하는 것을 제안했으며, 상업적인 기술협력 관계에서는 호혜적인 입장에서 기술지원을 장려하고 지원하는 체제 확립을 주장했다. 구체적으로는 장래의 수평분업 및 공동시장을 개척할 경우 상품에 대한 표준규격과 이에 관련된 시험평가제도의 조정을 제안하였고 한일산업기술협력위원회 설립을 제안하기도 했다.
최 박사님은 과학기술교육에 대하여 몇 가지 지론을 갖고 있었다. 첫째, 과학기술교육은 양보다 질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소수 정예 교육이라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음에는 연구중심 대학으로서 과학기술을 아는 교육이 아니라, 과학기술을 하는 교육을 통해 학생들에게 문제해결 능력을 부여토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아울러 장래 그 나라의 과학기술계를 끌고나갈 수 있는 소양과 인격을 배양해야 한다는 것, 즉, 올바른 인격형성에 치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세 번째는 교육도 중요하지만 교육 후의 조치가 더욱 중요하다는 관점 하에 교육받은 사람들이 제대로 일할 수 있는 바탕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최 박사님은 1987년에 ‘태국에 있어서의 고등교육 장기계획 작성’에 대한 자문을 했다. 이 때 주장한 것은 고등교육의 양을 늘리지 말고 질을 높이도록 하고, 연구중심 대학으로서 대학원 교육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또한 ‘대학교육은 왜 해야 하나’ 하는 기본 철학이 확실히 정립되어야 하며, 뚜렷한 철학이 확립되면 그것에 입각해 교육다운 교육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최 박사님은 또한 1991년에 태국 국제대학원 대학인 AIT에 대한 장래 발전방향에 대한 자문을 했다. 여기서 최 박사님은 “AIT는 학문추구를 주로 하는 일반적 대학원 형태를 유지할 것이냐, 아니면 자기 나라 산업발전을 도와주는 산․학․연 협동 위주의 사명지향적 대학원 교육에 치중할 것인가를 먼저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통해 최 박사님은 동남아시아에 소재하고 있는 대학임을 감안해 “첨단기술의 창조보다는 창조한 것을 어떻게 응용할까 하는 것에 치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최 박사님은 이외에도 파키스탄의 GIK 과학기술대학을 설립하는데 자문을 했는데 이 때, 최 박사님이 지론으로 갖고 있던 ‘과학기술교육은 양보다는 질’이라는 것, 연구중심대학으로서 ‘과학기술을 하는 교육’을 통해 문제해결능력을 부여토록 해야 한다는 것, 그 나라의 과학기술계를 끌고 나갈 수 있는 소양과 인격을 배양해야 한다는 것,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일을 할 수 있는 바탕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점을 주장했다.
회고록을 마무리하면서...
최형섭 박사님의 업적을 되돌아보고 새길수록 그 엄청난 스케일과 다양함에 새삼스레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앞으로 과연 어떠한 분이 이토록 대단한 일을 하실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또한 오로지 한 개인의 천재적인 재능과 피나는 노력은 물론 천운과 시운을 함께 타고나지 않았다면 이같이 거대한 업적은 도저히 이룰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최 박사님이 장관을 그만 두시자 수많은 곳에서 그에 걸 맞는 현직의 제공 제안을 마다하고 굳이 KIST 명예연구원으로 되돌아 오셨음을 볼 때, 그의 겸손한 삶에 우리 모두가 또 한 번 머리 숙여지지 않을 수 없다. 
2009년 현재의 KIST는 연간 연구계약고가 이미 연간 1,500억 원을 상회하였고, 이제는 세계적인 연구소로 발돋움하고 있는 단계이다. 대덕연구단지의 각 전문연구소도 그간 눈부신 발전을 이룩하여 오늘날 우리나라가 세계 10대 경제대국으로 도약하는 데 크나 큰 역할을 하고 있으며 이는 어느 개발도상국에서도 볼 수 없는 우리나라만의 강력한 저력의 근원이 되었다. 우리나라가 IMF를 성공적으로 극복한 것과 함께 2008년 말 금융위기로 촉발된 전 세계적 경제 불황의 위기도 OECD국가 중 가장 슬기롭게 극복하고 있는 점은 여러 가지 긍정적 요인들을 들 수 있지만, 그 중에서도 분명 최 박사님이 뿌리신 씨앗들이 결실을 맺음으로써 이 모두를 가능하게 만들었고 앞으로도 그렇게 기능할 것이라는 것을 누구도 믿어 의심치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지금도 최 박사님을 생각하면 평생을 언제나 바른 자세로 사셨고, 후학들에게는 호랑이와 같은 기세로 불호령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연구자는 시간관념을 갖지 말고 연구에 전념하라”, “연구자는 아예 돈 생각은 하지 마라”, “아무리 알아도 결국 아는 게 없으니 겸손하라”, “거짓말하지 말고 성실하라” 당신 스스로 몸에 익혀 후학에게 내리시는 연구자의 기본자세에 대한 훈화는 그분이 가진 생의 철학이었고 불꽃 튀기는 용광로와 같은 활력과 탐구력, 그리고 시대의 흐름을 꿰뚫어 보는 탁견과 꾸밈없고 소탈한 성품은 물론 자신의 모범적이며 절제된 청빈한 삶이 카리스마가 되어 더욱 더 힘을 발휘하신 것이다. 
최 박사님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생전에 서울과학관과 KIST에 기념전시관이 세워졌고, 타계하신 이후에는 과학계 인사로는 고 이태규 박사에 이어 두 번째로 대전국립현충원에 안장되는 영예를 안으셨다.
 
끝으로 대전국립현충원에 있는 그 분의 묘비의 글은 음미해 보면서 최 박사님의 회상록을 마무리 하겠다. 
“학문에는 거짓이 없어야 한다“, ”부귀영화에 집착해선 안된다“, ”시간에 초연한 생활연구인이 되어야 한다“, ”직위에 연연하지 말고 직책에 충실해야 한다”, “아는 것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모르는 것을 반성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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