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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학부] 故 박봉렬 교수 회상록

이름 |
관리자
Date |
2010-08-07
Hit |
8658
집필자: 최종범 전북대학교 교수



사회적 배경

 무릇 한 사람이 태어나 삶의 목표를 세우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할지라도, 삶이 다하여 그가 살았던 때를 되돌아보면 사회적 배경이 얼마나 개인에게 많은 영향을 끼치는지 금방 실감하게 된다. 삼은 박봉열 박사님은 조선시대 마지막 국왕인 순종의 국장이 있었던 1926년도 7월 30일에 충청남도 천안군 직산면 삼은리에서 출생하여, 21세기가 시작되던 2001년 7월 31일에 서울에서 7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다.  20세기의 3/4 기간 동안 사셨던 셈인데, 나라를 빼앗긴 식민지시대에 태어나 전쟁이 이어지던 때에 타국에서 젊은 시절을 보냈고, 학문의 불모지였던 한국에 돌아와 40여년을 후학 양성과 이론물리학 연구에 정진하여 많은 업적을 쌓았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고 하지만 만일에 박 박사님이 10년이나 20년쯤 후에 태어나셨다면 어떠한 삶을 사셨을까 생각해보면, 박 박사님의 삶은 필연적으로 그 태어난 때의 사회적 상황에 의해 많은 부분이 결정될 수밖에 없었다는 결론을 얻는다. 태어나던 1926년에는 6.10 만세 사건과 제2차 조선공산당사건이 있었으며, 1929년에는 광주학생사건, 1931년에 만주사변이 터졌고, 1935년부터는 학교에서 신사참배를 강요하기에 이른다. 아마도 이 시기에 박 박사님의 부모님들이 자녀의 교육 문제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셨으리라 짐작된다. 박 박사님과 관련된 글을 참고하면 박 박사님의 어머니이신 한용운님은 기독교인으로서 여장부의 기질을 가지신 분으로 묘사되어 있다. 결과적으로 10살가량의 장남을 일본으로 유학 보낼 결심을 하고 실행을 하신 것으로 보아 보통 분은 아니었던 것이 분명하다. 이 당시 미국은 공황으로 살기가 매우 어려웠으며, 1936년에 독일과 일본은 방공협정을 맺어 장차 연합군과 적대적인 관계로 나아가고 있었다. 따라서 개화된 신학문을 배우는 가장 빠른 방법은 일본으로 유학을 가는 방법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지만 소학교 5학년인 아이를 유학 보낸다는 생각은 여간해서는 하기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아무튼 박 박사님은 일본에 유학하여 1940년에 경도중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친구 분들의 기록에 의하면 박 박사님의 일본어 구사 능력이 워낙 탁월하여 전혀 한국인이라고 느껴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문학이나 예술적 감각이 뛰어나 아마도 물리학을 전공하지 않았다면 이런 분야로도 대성했을 분이었다고 한다. 

 당시 일본의 학제는 초등학교 6년, 중학교 또는 실업학교 5년, 고등학교 또는 전문학교 3년, 대학 3년으로 되어 있어서, 대학 진학을 원하는 사람은 중학교에서 고등학교의 코스를 택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아마도 중학교에서는 고등학교 진학을 위한 경쟁이 치열하였을 것이다. 한창 사춘기의 나이에 타국에서 홀로 입시 경쟁에 임한다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이었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그런데 일제는 1940년에 창씨개명을 실시하고, 인도차이나 반도에 진주하며, 1941년에는 결국 진주만 공격으로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고 만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1943년에는 조선인에 대해서도 징병제가 시행되고, 그 해 10월에는 조선인 학생에 대한 징병유예를 폐지함으로써 학병제로 조선인 학생들도 전선으로 내몰리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박 박사님은 담임선생님의 권유와 가족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전문학교 입학시험을 치르게 된다. 이 당시 박  박사님은 중학교 4학년이었으나, 이 해부터 중학교 4학년도 전문학교 입학이 가능해졌고, 관립학교의 입학시험 가운데 영어가 제외되고 일본어 작문이 그것을 대신하게 되었다고 한다. 담임선생님은 전문학교에서도 대학 진학이 가능하다고 박 박사님을 설득하였다는데, 아마도 급박하게 변화하는 전황을 고려하여 그런 선택을 하도록 유도한 것이 아니었을까 짐작된다. 박 박사님이 선택한 전문학교는 경도에서 남쪽 방향으로 있는 와가야마 (和歌山) 공업전문학교였는데, 이 학교는 와가야마고등상업학교 (高商)에서 경제전문학교 (經專)로 바뀌고, 다시 공업전문학교 (工專)로 바뀌었다고 하며 아마도 전시에 필요한 인력을 공급하기 위해 급하게 제도를 바꾸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입학시험 당일에 경도에서 전차로 갔으나 전차가 지연되어 지각하였는데, 감독 책임자의 허락을 받고 시험에 응시하였다고 한다. 시험이 끝나고 운동장 잔디 위에 누워 무심코 뜯어 올린 풀이 네잎 클로버였고, 일주일 뒤쯤 합격전문을 받았는데, 나중에 이 학교에 유가와박사가 와서 강연을 하였고 그 강연을 듣고 물리학을 하기로 결심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무언가 필연적인 운명을 암시하는듯한 대목으로 들린다. 박 박사님의 회상에 의하면 와가야마 공전에서는 전기과를 다녔지만, 그 분위기는 고등상업학교 분위기가 그대로 남아있어서 문과계 선생님들의 교양 과목 담당으로 고등학교 다니는 기분을 느끼셨던 것 같다. 전쟁이 막바지로 치달으면서 식량사정이 좋지 않았고, B-29가 비행하는 것을 바라다보곤 하였으며, 중학생 수학을 가르치는 가정교사로 학비를 벌기도 하였다고 한다.

 박 박사님이 입학했을 당시의 와가야마 공전에는 중학교 4학년 출신자와 상업학교 출신자가 비교적 많았었다고 한다. 이는 곧 전쟁 말기에 부족한 이공계 인력을 보충하기 위한 제도 변화를 뒷받침하는 것인데, 전후인 1946년에 공전이 없어지고 다시 경제전문학교가 부활하였고, 1949년에 와가야마 대학으로 바뀐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박 박사님도 군 입대에 관한 여러 가지 생각을 하셨을 것이고, 결국 일본군 간부후보생으로 육군 소위에 임관하게 된다. 그러나 다행히도 전쟁이 끝나 참전을 면할 수 있었는데, 1945년 7월부터는 와가야마 시도 공습대상이 되어 현청 근처가 불타고, 섬의 일부가 소실되었었다고 한다. 전쟁이 끝나면서 참전의 화는 면할 수 있었지만, 한국과의 연락이 두절되어 힘든 나날이 이어졌고, 일본 사회가 완전히 뒤바뀌는 혼란 속에서 대학진학을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을 굳혀갔다고 한다. 이런 와중에 1945년 12월에는 남해대지진이라 불리는 큰 지진이 나서 전기도 끊기고, 해일이 발생하여 학교 시험이 연기되는 등 힘든 일들이 겹쳤으나, 그러한 가운데서도 학문적인 서클들을 만들어 활동도 하고 종교적인 방면에도 관심을 두게 된다. 곧 기독교 청년회에 가입하여 해남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는데, 이는 어머니의 소망을 일본에서 이루어낸 일로 기억하고 있고, 포구에 있던 상원 (上原) 의원에 찾아가 미국 출신인 상원의 부인에게 영어를 배우기도 했다고 한다. 어려운 때일수록 미래를 대비하는 노력을 하셨던 측면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1946년 봄에 경도대학의 유가와 히데끼 교수가 학교에 와서 강연을 하였는데, 이 강연이 계기가 되어 대학에서 전기공학이나 수학을 전공하고자 했던 생각이 바뀌어 물리학을 전공하게 되고, 나중에는 유가와 교수의 연구실에 들어가 이론물리학을 탐구하게 되어 평생 이 분야에 정진하는 학자가 될 수 있었다.

  1947년 4월 고대하였던 경도대학 이학부 물리학과에 입학하였는데 입학인원은 35명이었다고 한다. 그 당시 경도의 한국인 사회에서 선망의 대상이 되었고, 박 박사님은 ‘온화한 미소’라는 트레이드마크로 통하였는데, 그 해에 개교한 조선중학교의 교사로도 활동하였다. 패전 이후의 말 그대로 배고픈 시대가 이어졌는데, 이러한 상황에서도 구도자적인 정신 자세로 면학에 임하였다고 주위의 분들이 기록하고 있다. 하숙집의 작은 방에는 작은 책상이 있었고, 책장에는 책들이 꽉 들어차 이불을 펼 곳이 없을 정도로 공부에만 전념하였는데, 조선중학교 학생들에게 다음과 같은 이백 (李白)의 시를 가르쳐주셨다고 한다.


 靜夜思


  牀前看月光        침상 앞에서 달빛을 보며
  疑是地上霜        땅 위에 내린 서리인가 하였네.
  擧頭望山月        머리 들어 산 위의 달 바라보다
  低頭思故鄕        고개 떨구어 고향 생각하네.


 고향을 떠난 지 10여년에 얼마나 가족과 집이 그리웠을까 생각하게 해주는 시이다. 이즈음의 회고담에 보청기 이야기가 빠지지 않고 나온다. 필자는 박 박사님을 1975년에 처음 뵈었으니까 50대가 다 되셨을 때여서 처음에는 거의 전혀 박 박사님 청력에 문제가 있다고 느끼지 못했었다. 나중에야 귀에 무언가 끼고 계신 것을 알았는데, 박 박사님 학창 시절엔 도시락 상자만한 큰 보청기를 가지고 다니신 이야기가 나온다. 이런 보청기를 앞에 내놓고 상대방의 말을 놓치지 않으려 애쓰던 모습들이 친구 분들의 기억에 생생히 남아있다고 한다. 아마도 어린 나이에 타국에서 혼자 생활하다 보니 자신의 건강을 충분히 보살필 만한 여유가 없었을 것이란 짐작이 든다. 1948년이 되어 2학년부터는 이론과 실험으로 전공이 나누어졌는데, 박 박사님이 택한 이론 그룹은 열 명도 안 되었다고 한다. 이들은 차츰 친밀한 사이가 되어갔는데, 모두의 기억 속에 박 박사님은 마음이 따뜻하고 남을 배려해주는 특별한 태도로 깊이 각인되어 있었다. 이 해에 4월부터 6월까지 유가와 교수의 양자역학 강의를 열심히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3개월 정도가 지난 후 유가와 교수는 중간자에 관한 연구 업적을 인정받아 미국의 Princeton 대학으로 연구차 떠났고, 남은 학생들은 식량은 물론 읽고 싶은 책조차 구할 수 없었던 어려운 시기임에도 모두가 눈을 반짝거리며 필사적으로 공부에 심혈을 기울였다고 한다. 이렇게 공부에 매달리다 지칠 때면 학교 동쪽 산기슭을 흘러내리는 시내를 따라 나있던 산책로를 즐겨 걸었는데, 이 산책로는 박 박사님의 학창시절과 연구원시절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소중한 쉼터가 되었다. 경도는 천년 동안 도읍이었던 고장으로 학교 근처에 고적과 고찰들이 있고, 주변에 조용한 주택가가 형성되어 많은 학생들이 이곳에 하숙하고 있었다. 대개는 하숙에 방만 빌려두고, 식사는 외식 식당을 이용하였는데, 틈나는 대로 고찰 등 천년 도읍지의 역사적 유물들을 찾아 음미하며 다닐 수 있었다. 이런 가운데 어느 날 한 고서점에서 발견한 조선고적도보 (朝鮮古蹟圖譜) 총서를 앞뒤 생각 없이 있는 돈을 다 털어 사들였고, 노후에 이 도보 총서를 서가에 꽂아 놓고 바라다볼 때마다 옛 시절을 회상하며 즐거운 마음이 되곤 하였다 한다.


 1949년 3학년이 되어 박 박사님과 후지하라 (藤原), 야마자키 (山崎) 세 사람이 유가와 교수의 연구실에 배속되어 소립자론을 연구하도록 배정받았다. 유가와 교수는 여전히 미국 Princeton 대학에 가 계셨으므로 이들 세 사람은 힘을 합쳐 공부에 임했는데, 그 해 8월 약 한 달간 야마자키 군의 아버지 출신지인 시코쿠 (四國)의 미우라 무라 (三浦村)에서 합숙하며 당시 막 출판된 Dirac의「양자역학」제3판을 원서로 열심히 읽었다. 책은 한 권 밖에 없었는데 그 즈음에는 복사하는 방법이 없어서 손으로 베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곳의 식량 사정은 경도보다는 좋았지만 고구마가 주식이었고 가끔 생선도 먹을 수는 있었다. 오전과 밤에는 가까운 소학교의 교실을 빌려서 열심히 공부하고, 오후에는 바다에서 수영을 하거나 자습을 했는데, 이 때 세 사람은 깊은 우정을 쌓게 되었다. 물론 일생의 연구 도구로 활용할 양자역학의 Dirac식 기술 방법인 브라킷 (braket) 기법을 확실히 파악하는 계기도 되었다. 그 해 10월 유가와 교수가 일본인 최초로 노벨상 수상자로 결정되자 큰 소동이 일어났다. 일시 귀국한 유가와 교수를 중심으로 여러 행사들이 있었는데, 매스컴의 취재로 유가와 연구실은 일약 유명한 연구실이 되었다. 유가와 교수의 노벨상 수상은 패전으로 실의에 빠져있던 일본인들에게 더할 나위 없이 큰 희망과 용기를 주었다. 그리하여 일본이 다시금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하는데 커다란 밑거름이 되었다.


 이듬해 봄 박 박사님은 경도대학 대학원에 진학하여 연구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 해 6월 한국전쟁이 발발하였고, 이로 인한 고민으로 공부에 전념하기가 매우 힘든 나날이 계속되었다. 여름방학이 되어 다시 친구들과 합숙하며 공부하는 일을 시도하였으나 장의 양자론에 관한 기초적 논문 몇 편을 읽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하지만 전쟁에 시달리는 조국의 현실을 타국에서 바라보면서 허송세월을 할 수는 없었다. 경제적으로도 어려운 여건을 타개하기 위해 요미우리 (讀賣) 신문이 제정한 ‘유가와 박사 노벨 물리학상 수상기념 우수논문상’ 공모에 응모하여 제1회 수상자의 영예를 누리게 되었다. 덕분에 유가와 장학금을 받으며 연구에 매진할 수 있었다. 처음 연구는 선배인 에나쯔 히로시 (江夏弘)씨와 양성자와 중성자의 질량 차이에 관한 주제로 시작하였다. 이 연구 결과는 1951년에 Progress of Theoretical Physics에 두 편의 논문으로 발표하였다. 다음 논문은 1954년에 한 편은 Physical Review에, 또 다른 한 편은 Progress of Theoretical Physics에 발표하였는데, 공저자들이 서로 다른 것으로 보아 유가와 연구실의 분위기는 매우 자유로웠던 것으로 추측된다. 1954년의 두 번째 논문 주제는 Foldy Transformation에 관한 것이었는데, 이는 스핀이 1/2인 입자를 기술하는 Dirac 방정식에 관한 것으로 박 박사님은 이 방정식이 갖는 내용의 풍부함과 형태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연구를 계속하여 1959년에 두 편의 논문을 발표하였고, 이 업적으로 1960년 4월 이학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대학원에 재학하고 있던 1954년 7월 박 박사님은 서울대학교 총장 최규남 박사의 초청으로 해방 후 처음 한국을 방문하게 된다. 아마도 우수논문상 수상으로 일본에서 이름이 잘 알려져 있었고, Physical Review에 논문이 실리는 등 연구 활동이 활발하여 초청되었던 것 같다. 한국물리학회의 기록에 따르면 우리나라 최초의 외국 학술지 논문 발표자는 최규남 박사이고, 그 다음이 박 박사님인 것 같다. 이런 이유로 1954년 7월 1일자 Physical Review에 박 박사님의 논문이 발표되자 초청된 것 아닌가 생각된다. 서울에 도착하자 나중에 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 교수를 지낸 박재용 선생이 안내하여 권녕대 교수를 만나게 된다. 권 교수는 당시 40대 중반으로 박 박사님 한국 방문의 실질적 책임자였는데, 이 일을 계기로 권 교수와는 사제지간과 다름없는 친교를 맺게 되었고, 부친을 여읜 박 박사님은 권 교수님에 대해 아버지 같은 느낌을 받고는 하였다고 한다. 이 때 권 교수님의 배려로 고향에 가서 가족과도 재회하였고, 여러 선생, 선배, 그리고 학생들을 만나며 서울대학교에서의 1개월을 충실히 보낼 수 있었다. 나중에 1970년에 학술원 회원이 되신 후 권 교수님과 같이 활동하시며 자연과학 분야 학술 발전에 힘을 모으실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서울대학교 방문으로 인해 오랜 기간 외국 생활로 소원하였던 한국에서의 대인 관계에 활로가 트일 수 있었고, 이에 힘입어 1960년에 서울대학교에 부임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일본으로 되돌아간 박 박사님은 대학원 과정을 수료하고 1957년부터 경도대학 기초물리학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일을 계속하였다. 1954년에 유가와를 위해 세워진 기초물리학연구소는 유가와 교수와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동창인 도모나가 교수가 설립에 힘을 써주었는데, 도모나가는 renormalization에 관한 업적으로 1965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였다. 같은 학교를 나온 동창이 서로 다른 업적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예는 거의 없는 일인데, 위의 두 사람은 서로 협력하며 항상 상대방을 칭찬하며 살았고 이를 가까이서 지켜보았던 일은 매우 행복한 일로 박 박사님은 기억하고 있었다. 특히 기초물리학연구소의 개소식에서 유가와와 도모나가가 나란히 서 있던 모습과, 결코 나서지 않으며 한 발 뒤에 서서 유가와를 세워주던 도모나가의 모습이 정말 위대해 보였다고 한다. 아무튼 박 박사님은 기초물리학연구소에서 Dirac 방정식의 변환에 관한 연구를 수행하여 두 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는데, 이 기간 중인 1958년 12월에는 경북대학교의 초청으로 대구를 방문하였고, 이 때 서울에 들러 권녕대 교수와 귀국 문제를 논의하였고 결국 영구 귀국을 결심하였다고 한다.


 1960년 4월 18일. 월요일. 이 날 2교시 서울대학교 원자력공학과의 물리학 강의 시간에 박 박사님은 박수를 받으며 한국에서의 첫 발을 내디뎠다. 4․19 전날이었던 이 날 학내는 소란스러웠으나, 신설된 원자력공학과 학생들은 들 뜬 마음으로 박 박사님의 출강을 기다렸다고 한다. 원자력공학과에서는 양자역학, 전자기학 등 물리학의 기본 과목은 물론 중성자 수송론 같은 원자로와 관련된 과목도 강의하여 능력 있는 공학도들을 기르는데 일조하였다. 그러나 이 당시 연구여건과 보수 수준은 매우 열악하여 연구와 강의를 충실히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대부분 교수들이 생계를 위해 사립대학들에 출강하였는데, 박 박사님도 중앙대학교 등에 출강하셨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렇게 몇 학기가 지나면서 학문 세계와는 점차 멀어질 상황이 되자 박 박사님은 과감히 미국행을 선택하였고, 1961년 9월부터 2년간 일리노이(Illinois) 대학에서 연구에 대한 집념을 불태울 수 있었다. 이 당시 원자력연구소에서 국비로 연구요원들을 해외에 파견하였는데 아마 박 박사님도 여기에 선발되셨던 것 같다. 1963년 8월에 귀국한 이후에는 한국에서의 연구여건 개선을 위해 노력하게 되는데, 세미나를 주최하거나 소립자토론회 같은 모임을 만들어 활동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1967년 봄에 이르러 한국물리학회 내에 입자물리학 분과회를 설립하는 성과를 올렸으며, 그 첫 분과회장에 박 박사님이 취임하였다. 이 해 가을에 영문학회지 발간이 결정되고 1968년 3월에 드디어 JKPS가 창간되어 비로소 국내 학자들의 업적을 해외에 알릴 수 있게 되었던 바, 박 박사님의 논문은 1969년에 처음 JKPS에 발표되었다. 이듬해인 1970년 당시 학술원 회원이던 박철재 박사가 서거하자 그 후임으로 학술원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이 때 물리학 부문의 회원으로는 최규남, 권녕대 박사가 있었는데, 두 분 모두 박 박사님의 업적과 인품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회원으로 적극 추천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 무렵 박 박사님은 한국물리학회 뿐만 아니라 한국원자력학회에서도 매우 활발한 활동을 하였는데 학회의 초대 편집위원장을 역임하고, 후에 협회 부회장으로 활약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순수한 이론물리학에 전념하고픈 마음이 간절하였을 것인데, 아마도 1974년 이휘소 박사의 서울대 방문과 1975년 서울대학교 관악산 이전이 큰 계기가 되어 물리학과로 자리를 옮기셨을 것으로 짐작된다. 1974년의 이휘소 박사 서울대 방문은 AID 차관 사업과 관련된 일이었는데, 이 일이 성사되어 서울대학교에 500만 불의 차관이 도입되었고 그 대응 투자 형식으로 20년간 교수 증원을 하도록 되어 있었다. 1975년에 관악산으로 이전하면서 물리학 관련 교수들을 모두 자연대 물리학과로 통합하였는데 이 때 박 박사님도 자연대 물리학과로 자리를 옮기셨고, 1976년 가을부터 1년 동안 AID 차관 사업의 일환으로 미국 SLAC에 연구차 방문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1975년 가을 학기에 서울대학교 물리학과에 처음으로 입자물리학 과목이 개설되었다. 이 첫 강의를 박 박사님이 담당하셨는데 Dirac 방정식과 관련된 전자의 스핀을 설명하면서 스스로 흥에 겨워서 한 손을 들고 혼자 빙그르르 돌기도 하였다. 젊었던 시절 자신이 연구하였던 주제를 관심 있어 하는 학생들에게 강의한다는 것은 얼마나 가슴 뿌듯한 일이었을 지 짐작이 간다. 이 강의를 들었던 학생들 중에서 입자물리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대학 교수가 된 사람들이 다섯 명이나 된다. 필자도 그 중의 한 사람인데, 이 중 몇몇은 곧바로 대학원에 진학하여 교수님에게서 상대론적 양자역학 강의를 들었다. 이 강의가 끝나갈 무렵 필자와 현재 충북대에 재직하고 있는 이해원 교수 둘이서 박 박사님을 지도교수로 정하게 되었다. 그런데 박 박사님께서 가을 학기에 미국 SLAC으로 연구차 떠나시게 되어 우리들을 그 때 막 귀국하셨던 소광섭 박사님께 소개해주셨다. 이런 만남을 주선하기 위해 소 박사님 내외분과 우리 두 사람을 교수님댁으로 초청하여 식사 대접을 해주셨는데, 처음에는 사모님이 이화여대 교수님이신 줄 전혀 몰랐다. 나중에야 사모님이 사회학 분야에서 활발히 활동하시는 저명한 학자이신 걸 알았으나 댁에서는 전혀 티를 내지 않으셨던 것이다. 소 박사님은 1967년 대학 4학년 시절 박 박사님으로부터 Goldstein의 고전역학을 배우셨다고 하는데, 소 박사님의 기억에 박 박사님 강의는 제대로 배운 몇 안 되는 과목의 하나였다고 한다. 소속은 공과대학 원자력공학과였지만 문리대 물리학과의 강의에도 정성을 쏟았고, 그 인연으로 소 박사님을 알게 되어 우리들에게까지 혜택이 돌아올 수 있었다. 우리들은 홍릉에 있던 소 박사님 댁으로 일주일에 한 번씩 공부를 하러 다녔는데, 이 때 공부한 것이 이휘소 박사님의 1973년 Physics Report C 논문이다. 가을 한 학기 동안 이 논문을 읽으며 게이지 이론을 공부하고 나서 소 박사님과 두 편의 논문을 쓰게 되었다. 하나는 Drell-Yan process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두 양성자의 충돌에서 발생하는 광량자에 관한 것이다. 앞의 것은 필자가 주로 쓰는 역할을 했고, 뒤의 것은 소 박사님이 쓰셨는데, 두 편 모두 1978년 8월 1일자 Physical Review D에 나란히 실렸다. 앞 논문은 1977년 6월 7일에 접수되었고, 뒤 논문은 12월 8일에 접수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지나간 이야기지만 앞의 논문에도 당연히 박 박사님 이름이 올랐어야 하는데, 결과적으로 박 박사님 대신 다른 교수님 이름이 올라 있다. 필자는 처음 써보는 논문이어서 어떻게 하는 것인지 몰랐는데, 아마도 게재료 문제 때문에 출장 중이신 박 박사님 이름이 빠진 것으로 기억된다. 이 논문을 접수시킨 지 열흘 째 되던 6월 16일 이휘소 박사는 교통사고로 타계하고 만다. 가을이 되어 박 박사님이 돌아오신 후 두 번째 논문을 보냈는데, 게재가 확정되면서 먼저 게재가 확정되었지만 게재료를 내지 못한 앞의 논문을 무상으로 실어줄 것을 요청하여 두 논문이 같은 날짜에 실리게 되었던 것이다.

 1978년 8월에 필자는 군에 입대하여 막 일병으로 진급한 때였다. 그런 어느 날 박 박사님 이름으로 된 초청장 한 부를 우편으로 받았다. 이 초청장은 ‘고 이휘소 교수 추모 국제 입자물리학 심포지움’에 관한 것이었다. 이휘소 박사를 기념하는 이 심포지움은 1978년 9월 1일부터 5일까지 서울대학교에서 진행되었는데, 조직위원장이셨던 박 박사님께서 필자에게는 초청장을 보내고, 사단장에게는 서울대학교 총장 명의로 협조 공문을 보내 필자의 참석을 도와주셨다. 군복 차림으로 국제 심포지움에 참석했던 기억이 새롭다. 이렇게까지 제자에 대한 배려를 해주신 것은 아마도 그만큼 제자에 대한 사랑이 크셨기 때문이리라 생각된다. 또한 1954년에 Physical Review에 논문을 게재하신 이후 24년 만에 다시 논문을 게재하시면서 이제는 한국에서도 독자적인 연구를 해갈 수 있겠다는 희망이 생겨나지 않았을까 짐작도 해본다. 아무튼 1980년 가을 박사과정에 복학하면서 박 박사님과의 만남은 재개되었다. 박 박사님은 등록금 문제부터 자취방에 관한 것까지 세심하게 신경을 써 주셨다. 겨울이 다가오면서 날씨가 추워지자 박 박사님께서 필자의 자취방에 놓을 석유스토브를 사러 가자고 하셨다. 연탄을 때는 방이었는데 제 때에 연탄을 갈 수 없으니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만 했다. 이 사정을 아신 박 박사님께서 석유스토브를 사주셨는데, 냄새가 나면 안 된다고 좋은 것으로 구입하자며 반포동의 어느 전문점으로 안내하셨다. 필자 형편으로는 엄두도 못 낼 제품을 산 후 이것을 필자의 자취방에 갖다 놓으시곤 아주 좋아하시는 것이었다. 이렇게 교수님의 기대 속에 박사과정을 마치고 직장을 구하게 되었는데, 하나 아쉬웠던 점은 박사과정에서 썼던 논문을 Physical Review에 게재신청을 했지만 거부되었던 일이다. 이 논문은 콰크의 스핀이  입자 같은 무거운 중간자들에서 어떻게 그 스펙트럼에 영향을 주는가 하는 문제를 다루었는데, 다른 사람들의 계산 결과가 틀렸다는 논문이 되어 결국 원저자들이 자기들 계산이 맞다는 주장을 하여 거부되었던 것이다. 이 문제는 얼마 후 독일의 다른 팀이 원저자들의 계산이 틀렸다는 증명을 하여 일단락되었지만, 이로 인해 박 박사님과 의견이 엇갈리고 서로 힘들었던 일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이렇게 어렵게 학위를 끝내며 직장을 구하게 되었는데 다행히도 공개채용 공고가 난 곳이 있어 응모하게 되었다. 필자는 공개 채용에 응모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하고 서류만 보내고 학과에 찾아가거나 연락을 취하거나 하지 않고 있었는데, 나중에 채용이 결정된 후 학과 교수님들 이야기를 들어보니 박 박사님께서 친히 학교에 찾아와 부탁을 드린 모양이었다. 이렇듯 박 박사님께서는 제자들과의 연구는 물론 일상생활, 취직과 결혼에 이르기까지 세심한 배려를 해주셨다. 직장을 얻은 그 해 겨울 필자의 결혼식 주례는 당연히 박 박사님이셨는데 공부에 뜻을 둔 신랑을 잘 보필하라는 박 박사님의 말씀이 가슴에 와 닿았는지 아직도 우리 부부는 공부에 열심인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지방에서 직장 생활을 시작한 이후에는 박 박사님을 자주 뵈올 수 없었지만 뵐 때마다 느낀 것은 언제나 한결같은 연구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계셨다는 점이다. 연초에 댁으로 찾아뵐 때마다 항상 최근의 연구동향에 대해 관심을 표명하였고, 형식적인 행사보다 실질적인 학문 탐구가 언제나 우선인 분이었다. 그 하나의 예가 논문집에 관한 것인데, 1986년에 회갑을 맞으시는 해여서 한 번 의논을 드렸더니 극구 사양하시며 아직은 더 연구에 정진해야할 때라고 하셨다. 그리고는 제자들의 연구 여건들을 개선하기 위해 여러 학교들을 방문하셨는데, 이 해에 너무 무리하셨는지 늦가을 어느 날 뇌출혈로 쓰러지시고 말았다. 다행히 빠른 대응으로 차츰 건강을 회복하셨는데 언젠가는 지압을 핑계 삼아 필자가 근무하고 있는 지방 도시를 방문하기도 하였다. 아마도 지금 생각하면 기대가 컸던 제자를 만나보고 싶은 생각도 있으셨던 것 아닌가 짐작된다. 이 시기에 필자는 박 박사님의 추천으로 1년간 미국 SLAC을 방문하게 되었다. 당신이 10여 년 전에 방문했던 연구소에 제자가 방문하게 되니 박 박사님도 감회가 크셨으리라 생각된다. 이 방문 기간 중인 1988년에 서울대학교가 비로소 인터넷 메일 시스템에 가입하게 되었고, 외국에서 곧바로 e-mail을 주고받으면서 앞으로 한국에서의 연구 여건도 곧 좋아질 것으로 기대했던 기억이 새롭다. 이 시기의 preprint 발행 체계를 보면 입자물리학의 경우 우선 SLAC 도서관으로 논문을 보내면 여기에서 번호를 부여받고 정리가 되곤 하였다. 이 당시부터 SLAC 도서관에서는 전자 문서화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지금 현재 필자의 연구실에서 원하는 거의 모든 논문을 앉아서 입수할 수 있게 된 상황은 이렇게 오랜 작업의 결과물인 것을 다시금 깨닫는다. 물론 이 시기에 SLAC과 CERN 사이에 어떻게 실험데이터를 주고받을 수 있을까 하는 논의도 있었는데, 그 이듬해 이러한 필요성에 부응하는 방안으로 World Wide Web이 나타나게 되었다. 1989년에 귀국한 후 박 박사님께서 정년 기념 논문집을 만들자고 하시면서 후학들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편집하기를 원하셨다. 약 2년여에 걸쳐 이론물리학 분야의 내용들을 정리하는 논문들을 모아 한 권의 책으로 출간하였다. 퇴임 직전인 1990년에는 그토록 만들고 싶어 하시던 이론물리학연구소를 설립하여 연구소장으로 봉사하셨는데, 이 해 봄에는 한국물리학회 회장으로도 출마하셨으나 아깝게도 3표 차이로 다른 분이 당선되었던 기억이 있다. 그 여름에 연변에서 현대물리 학술토론회가 열렸는데 박 박사님과 필자는 같이 홍콩과 북경을 거쳐 백두산까지 여행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이 회의에는 북한 학자들도 5명이나 참가하여 남북 관계의 변화를 예측케 하였으나 북한에서 열기로 했던 2차 회의는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 1991년 봄에 박 박사님은 대한민국과학상을 수상하셨고, 그 해 8월 정년 퇴임하셨다. 퇴임 이후 10여 년간 한국 사회는 정권교체, IMF체제 등 많은 변화를 겪었으며, 새로운 세기가 시작되던 2001년 여름 아직도 풀어야 할 문제를 남겨두신 채 영면에 드셨다.

삶의 자세, 인간적인 면모

 박 박사님을 평한 가장 간단한 한마디가 있다. 영원한 공부벌레. 박 박사님과 같이 경도대학을 다닌 김여택 교수님의 평이다. 이미 대학시절부터 이러한 별명이 따라 다녔으나 사실은 삶 전체를 놓고 보아도 이보다 더 적절한 표현은 없을 듯하다. 박 박사님의 면학 태도는 구도자 정신 바로 그것이었다고 한다. 저녁 식사 후 공중목욕탕에 가서 10분 정도 온탕에 몸을 담구었다가 바로 하숙방으로 돌아가 공부를 시작하면 보통 새벽 2시경까지는 꼼짝 않고 공부를 계속했다고 한다. 박 박사님의 열정과 노력, 학문에 대한 집념은 대단하여, 여름밤에 졸리면 얼음물을 담은 대야에 발을 담그면서까지 공부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공부를 잘 하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차가운 성격인 것에 반해, 박 박사님은 누구의 기록에서나 성품이 온화하고 따뜻한 분으로 기억되고 있다. 이것은 아마도 자신에게는 엄격하고 다른 사람들은 따뜻한 마음으로 배려해주는 삶의 자세가 몸에 배어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1947년 경도에서 개교한 조선중학교에서 박 박사님은 물리 교사로 근무한 적이 있었는데, 이 때 학생이었던 분의 기록을 보면 그 당시의 선생님들이 정열적으로 조국애와 민족 사랑을 가르쳐 주셨다고 한다. 일본에서 자란 교포들에게 처음으로 민족의 혼을 알게 하여 커다란 감명을 주었고,  그들이 성인이 되어서도 결코 잊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 분의 기록에 의하면 박교수님은 얌전한 학자 타입으로 언제나 미소를 지으시고 수업에서도 간절하게 가르쳐 주시는 분이었다고 한다. 이렇듯 박 박사님은 새로운 학문을 배우기 위해 식민지 시절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구도자의 자세로 학문에 임했고, 교포 학생들에게는 자신들의 조국과 민족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기 위해 정성을 다했던 것이다. 대학 시절 “조선 고대 문화에 대하여”라는 고고학 강의에 열중하여 우리나라 문화유산에 대해 관심을 쏟았던 일도 있었는데, 일본인 교수의 강의에서 자신의 나라 문화를 배우면서 강한 감명과 함께 큰 자부심도 느꼈다고 한다. 이러한 마음가짐이 있었기에 패전 후 일본에서 경제적으로 매우 곤란했을 때에도 고서점에서 조선고적도보 총서를 발견하고는 주저하지 않고 사들였던 것이다. 이론물리학이라는 어려운 학문을 하면서도 위와 같은 일들이 가능했던 것은 문학에 대한 유별난 정열과 예술에 대한 예민한 감각이 있었기 때문인데, 박 박사님은 수필 쓰는 것을 좋아하였고 일본 와가 (和歌)에 대해 남다른 조예가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재능은 그대로 후대에 이어져 큰 따님은 훌륭한 피아노 연주가로 활약하고 있다.

 귀국하여 서울대학교에 근무하신 이후로 제자들을 대하신 태도는 간단히 말하자면 학업에는 엄격하되 개인적인 일에는 매우 자상한 분으로 표현된다. 물리학의 특성상 맞고 틀림이 확실한 학문이어서 학업에 있어 적당히 넘어가는 일은 없었고, 이로 인해 박 박사님을 처음 대하는 학생들은 그저 엄격하기만 하신 분으로 생각하기 십상이었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설수록 인간적인 따뜻함이 배어나오는 분이었는데 그러한 기록은 수없이 많이 있다. 유학을 간 제자들에게 국제 전화를 걸기 위해 중앙우체국에 여러 번 가시던 모습, 제자들을 위해서 민망할 정도로 남에게 고개를 숙이시던 일들, 관청이나 외부 사람들을 만나러 가실 때 제자들을 같이 대동하고 다니시던 행동, 제자들의 얼굴색이 좋지 않다고 병원에 미리 예약해 두었던 세심함, 교직원 버스에 학생을 태우고 시내에 내린 후 아이스크림을 사 주신 기억들, 군에 가는 제자들의 환송식을 열고 격려했던 추억, 제자의 유학허가서를 몇 번이고 읽으시면서 좋아하시던 모습, 대학원 등록금 마련을 위해 애쓰시던 자상함, 직장을 잡은 제자의 연구 여건 개선을 위해 술도 마다하지 않던 일들… 이와는 달리 당신의 개인적인 신상에 대해서는 퍽 과묵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필자의 경우 사모님이 이화여대 교수로 재직하고 계신 최숙경 님이란 것을 나중에야 알았고, 친구 분의 기억에 의하면 박 박사님 모친상에 문상을 갔을 때 빈소가 적적하여 의아하게 생각한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1986년에 쓰러지셨을 때도 필자는 한 달이 넘도록 모르다가 정초에 세배를 가서야 알았고, 두 따님과 아드님에 대해서도 거의 아무런 말씀이 없으셔서 큰 따님의 예술의 전당 독주회는 다른 분의 글을 통해 알았을 정도였다. 이렇듯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따뜻한 마음씨는 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인상적으로 남아있는데, 흥겨운 자리에서는 남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표현하기도 하였다. 일본의 유가와 연구실에서 연구하고 있을 때 계절에 따라 하이킹도 가고 연말이면 망년회를 했다고 한다. 한 번은 망년회 석상에서 친구들의 요청에 따라 도라지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노래에 따라 자연스럽게 손발이 움직이며 춤이 되었는데, 너무도 잘 추어서 참석자 모두 친밀한 분위기를 느꼈었다고 한다. 필자도 강의 시간에 전자의 스핀을 설명하시다가 한 손을 들고 빙그르르 도시는 모습이 눈에 선한데, 그 행동이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속으로 부러워했던 적이 있었다. 스스럼없이 자신의 느낌을 표현하는 일은 남을 의식하는 평범한 사람의 경우 자연스럽게 나타내기가 좀처럼 쉽지 않은 법이다.

 퇴임하신 이후 10여 년간은 자주 만나 뵙지 못하였으나 정초에 세배를 갈 때마다 최근의 연구 동향에 대해 관심을 표명하셨는데, 그 관심의 정도가 현역으로 일하고 있는 필자보다 더 간절하신 측면이 있어 자신을 반성하게 만드시곤 하였다. 사모님께 하셨던 아직 풀어야 할 물리 문제가 남아 있어 당신 건강은 문제가 없다던 그 마지막 말씀이 영원한 공부벌레라는 별칭과 너무도 잘 어울리는 것 같아 교수님의 모습과 자꾸만 겹쳐져 떠오른다.

업적 및 의미

 박 박사님의 업적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강입자의 존재와 그 구조 규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49년 대학 3학년 때 박 박사님과 후지하라와 야마자키 이렇게 세 사람이 유가와 연구실에 분속되었는데, 이 당시 유가와 교수는 미국 Princeton 대학에 출장 중이어서 연구에 관한 초기 경험은 연구실의 선배나 동료들과 같이 쌓은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1950년 대학원생으로 연구를 시작하여 처음 발표한 논문 두 편은 1951년에 Progress of Theoretical Physics에 실렸는데 이 때 공저자는 에나쯔 히로시 선배였다. 두 편 모두 양성자와 중성자의 질량 차이에 관한 내용이다. 그리고 3년 뒤인 1954년 콜롬비아 대학을 방문하고 돌아온 에나쯔와 하세가와 이렇게 세 분이 쓴 논문이 Physical Review지에 실렸는데 논문 제목은 Theory of Unstable Heavy Particles이다. 여기에서 다룬 것이 우주선 속에서 발견된 V입자의 질량에 관한 것인데 아직 입자가속기 실험에서 새 입자들이 발견되기 이전 우주선 관측으로부터 찾아낸 무거운 입자를 중간자 개념과 연계하여 설명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이 논문은 한국인이 Physical Review에 발표한 최초의 핵-입자 관련 논문으로 추정된다. 1930년대에 최규남 박사가 다른 분야의 논문들을 발표한 예가 있지만 아직 1930년대에는 미국이 물리학계를 주도하고 있지는 않았다. 위 논문을 쓸 당시의 분위기는 중간자 이론으로 유가와가 노벨상을 수상한 직후여서 중간자 개념을 응용하려는 시도를 집요하게 하고 있었다. 1980년대에 박 박사님과 토론하던 도중 Quantum Meson Dynamics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아마도 1950년대에 이러한 시도들을 하였던 하나의 예가 위 논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같은 해인 1954년에 또 다른 논문 하나를 Progress of Theoretical Physics에 게재하는데 이 논문은 중간자론에 있어서의 Foldy 변환에 관한 것이다. Foldy 변환은 스핀 1/2인 입자를 기술하는 Dirac 방정식에 관한 것으로 이미 스핀이 정수인 중간자의 기술에 스핀 1/2인 입자의 관련성을 찾고 있어, 이 방향으로 계속적인 연구가 이루어졌다면 1960년대에 나온 quark model로 이어질 수도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일이 쉽게 진행되지는 않아서 1954년부터 1959년 사이에 새로운 논문이 발표되지는 못하였다. 1959년에 박 박사님은 단독으로 두 편의 논문을 발표하는데, 두 편 모두 Dirac 방정식의 변환 성질에 관한 것으로 1954년 Foldy 변환 논문의 심층 연구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 두 편의 논문을 인정받아 이듬해인 1960년에 박 박사님은 이학박사 학위를 수여받고 한국으로 귀국하였다.

 귀국 후 초기에는 발표된 논문이 없다가 미국 Illinois 대학에서 연구하고 돌아온 1963년 Regge trajectory에 관한 논문을 Progress of Theoretical Physics에 발표하였다. 그리고 한국물리학회에 JKPS가 만들어지고 난 1969년에 JKPS에 논문 1편, JKNS (한국원자력학회지)에 1편을 발표하였는데 두 편 모두 스핀 1/2인 입자들의 성질에 관한 내용이고, 이듬해인 1970년 JKNS에 중성자 수송에 관한 논문 두 편을 발표하였다. 1972년에도 JKNS에 중성자 수송에 관해 두 편의 논문을 발표한 후, 1975년 자연대 물리학과로 자리를 옮긴 후 1년 뒤인 1976년 새물리지에 Quark Confinement에 관하여 기술한 내용을 발표하였다. 이러한 논문 주제의 변화를 살펴보면 귀국 이후 학위 과정에서 다루었던 내용들을 심화시키려 노력하다가, 자신이 몸담고 있던 원자력공학과와 관련된 중성자 수송론 등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다시 물리학과로 옮긴 후에는 입자에 관한 내용으로 연구 주제를 바꾸며 적응하였다. 물리학과에서 연구에 관한 자신감을 갖게 되는 논문은 역시 1978년에 Physical Review D에 발표한 양성자-양성자 충돌과 관련한 논문 두 편인데,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Drell-Yan process에 관한 논문에는 박 박사님 이름이 빠져있고, 광량자 생성에 관한 논문에 소광섭 박사, 이해원, 그리고 필자와 같이 저자로 등재되어 있다. 이 논문을 기화로 서울대 물리학과에서 박사과정 학생들과 연구에 대한 의지를 되살릴 수 있었는데 그 내용들을 보면  나 ϓ과 같은 무거운 중간자들에 관한 것, turbulent plasma에 관한 것, non-linear Chiral Lagrangian에 관한 것, QCD에 관한 것, non-Abelian gauge theory에 관한 것, loop 계산에 관한 것, unification에 관한 것, spin splitting에 관한 것, renormalization에 관한 것, higher-derivative operator에 관한 것, anomaly에 관한 것, Chern-Simons 이론에 관한 것, strong CP problem에 관한 것 등이다.  위와 같은 다양한 연구 주제로 논문을 쓸 수 있었던 배경에는 새로운 연구 동향에 대한 호기심과 더불어 도전적인 시도를 끊임없이 하는 학문 자세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주제들을 크게 정리하자면 1950년부터 1974년까지와 1975년부터 1993년까지, 그리고 그 이후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처음 20여 년간의 주제는 중간자와 그 스핀 구조, 그 다음 20여 년간의 주제는 QCD와 관련된 문제들이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주제의 설정에는 유가와 교수와 이휘소 박사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판단되는 바, 초기의 주제가 중간자와 관련된 것들이 되는 것은 필연적인 상황으로 볼 수밖에 없다. 1950년대 일본의 상황과 1960년대 한국의 상황에서 연구의 주제로 삼을 수 있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지도교수의 중간자 이론을 발전시키고, 응용하는 일이 될 수밖에 없었고, 이러한 상황이 반전된 것은 1970년대 초반 gauge 이론의 등장과 그 핵심적 역할을 수행했던 이휘소 박사의 한국 방문이 커다란 자극제가 되었을 것이다. 반전된 상황에도 불구하고 연결되는 연구 주제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은 1976년의 새물리 논문 제목을 보면 알 수 있다. 그것은 quark confinement인데, 이것은 중간자를 핵자 사이에 힘을 매개하거나 양성자와 중성자의 질량 차이 등에 영향을 주는 입자로 보는 관점을 벗어나서 본격적으로 그 구조 문제를 QCD와 관련하여 보기 시작하는 관점으로의 변화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 변화의 과정에 gauge 이론의 등장이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 분명하고, 이 이론의 논리적 틀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무한대의 문제를 해결하는 renormalization과 관련하여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이휘소 박사는 1970년대 초반 많은 일을 하였다. 그 이휘소 박사가 1974년 서울대학교를 방문하게 되고, 이듬해인 1975년 서울대학교의 관악산 이전과 더불어 물리학과의 확대 개편에 발맞추어 박 박사님은 본래의 전공 분야인 이론물리학의 연구로 돌아오기 위해 자연대 물리학과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그리고 처음 발표한 논문 제목이 quark confinement인데, 결국은 2001년 서거하실 때까지 가슴속에 이 연구 주제를 가지고 계셨던 것이다. 

 1978년 이후 논문의 공저자로 등장하는 사람들을 보면 소광섭, 이준규, 조용민 교수 등이 있다. 소광섭 교수는 대학 4학년이었던 1967년에 박 박사님으로부터 고전역학을 배웠다고 하는데, 이런 인연으로 1976년 귀국하였을 때 연구에 대한 격려와 뒷받침을 받아 서울대학교로 직장을 옮기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으며 이후 여러 편의 논문을 같이 발표하게 된다. 관악산 이전 후 제도의 정비를 거쳐 1976년경부터 제대로 된 대학원 교육이 시작되었고, 이 교육을 받은 학생들이 박사과정에 입학하면서 서울대학교에서의 연구 활동이 활성화되기 시작하였다고 볼 수 있다. 입자물리학 분야에서는 필자가 1978년에 박사과정에 입학하였으나 곧 군에 입대하였다가 1980년 복학하였고, 1979년 이해원군이 박사과정에 진학하였다. 이무렵 여러분의 교수들이 새로 오시게 되는데 입자 분야에서는 이준규, 김진의, 조용민 교수 등이다. 1980년대 초반에 박 박사님은 이준규  교수와 여러 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는데, 이 때 이해원군과 민현수군이 같이 연구에 참여하였다. 1980년대 후반에는 조용민 교수와도 같이 발표한 논문이 있는데, 조용민 교수는 1990년대 들어 아시아-태평양 이론물리센터를 설립하고 초대 사무총장에 취임하여 많은 일을 하였다. 이렇듯 서울대학교에서 이론물리학을 전공하려는 학생들이나 막 귀국한 교수들에게 박 박사님의 존재는 매우 커다란 버팀목이 되었으며, 이 버팀목의 그늘에서 자라난 2세들이 이제는 여러 대학에서 연구와 교육에 봉사하는 중추적 역할을 수행해내고 있다. 박 박사님이 틈만 나면 말씀하시던 유가와와 도모나가처럼 이제는 한국에서도 자체의 연구 성과로 노벨물리학상도 받고, 세계 학회에도 공헌하는 인물들이 나올 만한 토대가 마련되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이러한 토대를 마련하는데 바쳐진 박 박사님의 일생을 돌아보며 더욱 더 분발해야겠다는 다짐을 하며 회고에 대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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