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부] 故 강영선 교수 회상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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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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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박상대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하곡 강영선 박사님은 1940-1980년대 초에 걸쳐 당대 한국을 대표하는 세포학 및 유전학자로써 그 학문적 명성은 세계 석학 반열에 올려도 전혀 손색이 없다. 뿐만 아니라 강 박사님의 이전은 물론이고 3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의 업적을 능가하는 후학들이 많지 않기에 더 큰 존경심과 추모의 정을 갖게 한다.
1. 사회적 배경
1) 출생과 가정
강 박사님은 1917년 부친 강낙주 (姜洛周) 선생과 모친 허징 (許澄) 여사의 3남중 장남으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선대의 고향은 충남 청원군 풍세면 풍세리 621 번지로 천안에서 약 10리 떨어진 시골이다. 부친은 일본 중앙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한 지식인으로 안재홍, 김병로와 친교가 두터웠고, 모친은 이화학당 (4회) 졸업생으로 신여성 박인덕과 동기이다. 두 아우 강정선, 강종선은 고등학교 교사였으니 삼형제가 모두 교육계에 종사한 셈이다.
조선 정조조의 대표적인 서화가 표암 (豹庵) 강세황 (姜世晃)의 직계 후손으로 그는 가문에 대한 자부심이 컸다. 고모 강병주는 성심대 총장을 지낸 김재순 수녀와 경제수석으로 버마 아웅산에서 순직한 김재익의 모친이고, 춘원 이광수는 이모부가 된다. 비교적 유복한 가정환경에서 자랐으며 특히 어머니의 극진한 사랑을 받았다. 평생 양친을 함께 모시고 효성을 다했으며 모친은 71세에 돌아가시고, 부친은 94세까지 장수하셨다.
강 박사님은 북해도제국대학을 졸업하던 해인 1943년 10월, 황해도 옹진 출신으로 해주의 행정고녀를 나와 일본 동경의 실천여자전문학교 가정학과를 졸업하고 성신여고의 교사로 있던 공규선 (孔圭善) 여사와 결혼하였다. 공여사와의 사이에는 태호, 태성, 태백 세 아들과 고명딸 태임을 두었다. 공규선 여사는 선생이 대학에서 연구에 전념할 수 있도록 내조에 정성을 다한 분이였으나 1974년에 돌아가셨다. 상처한지 2년 후 마음을 가라앉힌 그는 1976년 8월 리라초등학교 교사이던 한우경 (韓祐卿) 여사와 재혼하였다.
강 박사님은 학문적으로는 성공한 학자였고 사회적으로도 지도급 명사였으나, 정년퇴임 후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서울특별시 부암동 사저마저 남에게 넘어가고 작은 셋집에서 어렵게 생활하다가 말년에는 암으로 인한 건강 악화까지 겹쳐 1999년 2월 3일 보령 82세로 세상을 하직하셨다.
2) 교육
강 박사님은 7세 때 지금 서대문구 부암동으로 이사 와서 청운보통학교와 제2고등보통학교 (현 경복고)를 졸업하고, 1937년 수원고등농림학교 축산과 제1회 입학생이 되었다. 여기서 그는 고려대학교 농대 교수가 된 김장수와 문교부 장관을 지낸 민관식을 만났다.
초․중․고에서는 성적이 2~5등에 들어갈 정도로 우수한 학생이었다. 고보 2학년 때 장티푸스로 심한 고생을 한 뒤 건강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어 육상경기부에 들어가 투포환을 시작했다. 매일 방과 후 2~3시간 투포환 연습, 귀가 후 1시간 이상 철봉과 역도로 기본 체력을 늘이고 아침에는 4km 이상 로드웍과 줄넘기로 체력 단련을 했다.
고보 4학년 때 전국 인터미들 (중학교 선수권대회)에서 입상을 한 것이 선수 생활의 첫 입상 경력이다. 이어 수원고농에서는 조선 대표 선수가 되어 일본과 만주 대회에도 출전하고, 1939년에는 대학, 일반 대항 경기에서 투포환에 1등을 해 조선 선수권을 획득하고, 그해 각 종목 5걸 발표에서 투포환 1위에 선발되었다. 선수 생활은 경복 3년, 수원고농 3년, 북해도제대 1년 도합 7년이 된다. 그러나 대학 2학년부터는 졸업논문 준비 관계로 선수 생활을 계속하지 못했다. 그는 ‘문무겸전’의 좌우명에 따라 운동선수로 활약하면서 학업에도 충실하였다. 그의 운동선수 생활로 단련된 체력은 그 뒤 지구력이 뒷받침 되어야 하는 연구 생활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회고한바 있다.
1941년 강 박사님은  방계 입학시험을 거쳐 북해도제국대학 이학부 동물학과에 입학한다. 방계 입학이란 고등학교나 예과부 졸업생들을 1차로 선발하고, 결원이 있을 경우 전문학교 졸업생에게 일정한 시험을 거쳐 입학의 기회를 주는 제도이다. 그는 전문학교(수원고농) 출신이기에 방계 입학한 것이다. 그가 입학한 동물학과는 당시 3강좌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제1강좌는 형태학 (세포학이 주가 됨), 제2강좌는 동물분류학, 그리고 제3강좌는 발생․생리학 강좌였다.
 그는 오구마 (小熊捍) 교수의 세포학 강의에 매료되었다. 오구마는 대학 전체를 통해 명강의로 유명하였을 뿐 아니라 그의 인류 염색체 연구는 세계적인 수준이었다. 1936년 사람의 염색체 수가 2n=47, 성염색체는 남자가 XO, 여자는 XX라고 주장하여, 미국의 페인터(T. Painter) 교수의 2n=48, 남자 XY, 여자 XX의 주장과 맞서 논쟁을 벌인 당시 인류세포유전학 연구의 양대 산맥을 이룬 분이다. 오구마 교수의 세포학 명강의와 그리고 마끼노 (牧野佐二郞) 조교수와 니야마 (新山英二郞) 조수의 감화를 받아 2학년 초에 전공을 세포학으로 정하고, 그중에서도 염색체에 대한 연구를 할 것을 결심하였다.
그러나 강좌 담당 교수 오구마가 당시 이학부장 (현 자연대학장)직을 맡고 있었기에 졸업논문의 실질적인 지도는 마끼노 조교수에게서 받게 되었다. 그래서 정해진 그의 졸업논문의 방향은 ‘야생 (들쥐) 서류의 난자성숙과 수정에 관한 세포학적 연구’가 되었다. 이는 마끼노의 박사학위 논문 주제인 ‘생쥐의 난자 성숙과 수정에 관한 세포학적 연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 졸업논문을 위해 그는 1942. 4. - 1943. 3.까지 1년간 327마리의 시궁쥐를 채집해 이중 암컷만 골라 난소를 고정하고 파라핀에 매몰한 재료를 10μ의 절편으로 잘라 염색을 한 뒤 프레파라트를 만들었다. 졸업논문은 이렇게 해서 만든 약 3,000매의 프레파라트를 현미경을 통해 관찰, 분석하여 완성하였다. 소위 형태학의 고전적 방법인 마이크로테크닉을 사용한 것이다. 그의 졸업논문 제목은 「삽포로 시궁쥐의 생태학적 관찰」로써, 쥐의 번식이 계절적인 요인과 연관되어 있음을 입증한 최초의 논문이어서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강 박사님은 북해도제국대학 3년 동안 학문적인 소양을 키워 나가는데 많은 영향을 받았다. 북해도제국대학은 ‘젊은이여, 대망을 가져라’(Boys be ambitious)로 유명하다. 일본 정부가 북해도에 국립대학교를 창설하면서 초대 학장으로 미국의 캘리포니아대학 데이비스 캠퍼스 (UC, Davis)의 농대학장으로 있던 크라크 (Clark) 박사를 모셨다. 그가 임기를 끝내고 귀국하면서 남긴 이 말이 세월이 갈수록 유명해져 북해도대학을 상징하는 것처럼 되었다. 그분의 흉상에 새겨진 이 글귀는 강영선의 학문적 열정을 불태운 좌우명이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다음으로 그는 교수들의 강의 내용이 충실한데 감명을 받았다. 자신들의 전공 부분에서는 외국 학술지를 소개하며 외국 학자들과 의견을 달리하는 이론적, 실험적 뒷받침을 강조하는데 놀랐다. 그도 학위를 받은 뒤 저분들과 같이 훌륭한 교수가 되리라 다짐하였다.
또 대학 졸업 후 10년 동안 조수 생활만 하는 선배가 “학문하는 사람은 출세나 금전에 연연하지 않고 연구에만 몰두하여 고생 끝에 한편의 논문이 완성되면 최대의 기쁨을 느낀다. 이 논문은 후배에게는 횃불이 될 것이며, 또 이름이 후세에 남게 될 것이니 이 얼마나 보람 있는 일인가”라고 했던 말은 그가 학문에 대한 애착과 희망을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는 대학 학부에서 동문수학을 한 북해도제대 식물학과의 이민재, 선우기, 김삼순을 만나 평생지기가 되었으며, 모두 해방 후 서울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또 훌륭한 일본인 교수와 선후배를 만나 졸업 후 연구 생활에서도 서로 큰 도움을 주고받았다.
2. 과학자로서의 면모
1) 연구실의 일과
강 박사님은 매일 9시에 출근하여 별일이 없는 한 5시에 퇴근했다. 오전 오후 한번 씩 가까운 곳에서 차를 들었고, 점심은 사모님께서 준비한 도시락으로 혼자 들었다. 강의나 교수회의 등 공식적인 일로 방을 비우는 일 이외는 대부분 연구실에 머물면서 집필, 교정, 현미경 관찰 등 연구에 전념했다. 그래서 그는 시계의 추처럼 정확히 하루의 일과를 예정대로 보내는 분이었다.
할 일 없이 다른 교수들의 방을 기웃거리거나, 아래 교실원들의 방을 찾는 일도 없었다. 또 일과 중에 테니스 등 운동을 한다거나, 기분 전환을 위해 잠시 마실 다니는 일로 시간을 보내는 일이 없었다. 피곤하면 잠시 소파에서 눈을 붙이고 휴식을 취할 뿐이다. 가까운 친구도 없고, 가정에도 소홀하셨던 선생은 그래서 연구에만 몰두하신 고독한 분이셨다. 만약 학문에 대한 즐거움이나 그 성취에 대한 기쁨이 없었다면 그는 정말 불행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의 연구실은 연구자로서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공간이다. 연구실 창가 끝 중앙에 위치한 집무 책상 왼쪽에는 보조 책상과 캐비넷을, 바른쪽에는 문헌장과 서가를 두고, 가운데는 소파를 놓았다. 보조 책상에는 현미경과 탁상 캐비넷을 올려놓았는데, 탁상 캐비넷과 그 옆 대형 철재 캐비넷에는 항상 중요한 실험 재료, 시약, 소기구 등이 보관되어 있어 연구에 대한 준비가 철저하였다. 방에 특별한 장식이나 액자는 걸려 있지 않았지만 깔끔하게 잘 정돈 된 연구실은 집무와 연구를 위해 효율적으로 잘 배치된 빈틈없는 공간이었다. 
그리고 책상 오른쪽 모서리에는 여러 개의 호출용 인터폰 단추가 있는데, 교실원의 서열에 따라 조교수, 전임강사, 강사, 조교, 사무원 등의 순서대로 각 방에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 조교수를 부르는 단추를 잘못 눌러 강사를 부른다거나, 사무원을 부를 때 조교의 인터폰 단추를 누르는 일이 없는 정확한 분이셨다.
그는 또  체계적이고 완벽한 업무 처리로 유명하다. 그 비결이 단지 기억력 때문이 아니라 몸에 벤 오랜 메모 습관에서 온 것이다. 그의 책상 왼쪽에는 비로드 표지로 싼 비망록이 한 권 있다. 이 노트의 맨 왼쪽은 일련번호, 가운데는 수행 예정 사항, 오른쪽은 계획 완료 날짜가 적혀 있다. 예컨대 국제원자력연구 (IAEA) 연구보고서 초안 작성 완료 예정일을 1월 20일로 정하고, 이를 1월 1일에 계획한 첫 번째 일이면 1번의 일련번호를 메긴다. 그 뒤 예정된 계획이 완료되면 붉은 색연필로 그 번호 위에 동그라미로 표시한다.
그래서 매일 출근하면 붉은 표시가 없는 미완성 부분만을 챙기고 또 새로운 계획을 적어 당신의 강의, 연구, 대외 활동 등 모든 것을 엄격히 점검, 통제, 관리하고, 하루가 지나면 이를 정리, 종합하여 일기 형태로 기록을 남긴다. 그래서 선생의 치밀함과 정확성은 매사 작은 일에도 기록을 남기는 오랜 습관에서 온 것으로 생각된다.
2) 충실한 강의
34년간 서울대학교에 봉직한 강 박사님은 강의에 대단히 충실한 교수였다. 학기 첫 시간부터 그의 면모는 언제나 같았다. 1950년대 마땅한 교재가 없었던 시절이라 그는 우선 학과목에 대한 참고 문헌을 소개하고는 바로 강의에 들어가 또박또박 강의 내용을 설명하며 강의 시간을 다 채우고 나간다.
그는 결코 결강을 하거나 조교나 강사에게 대강을 부탁한 일이 없고, 또 일찍 나가거나 늦게 들어오는 일도 없다. 어렵고 딱딱한 현대 생물학 내용을 쉽고 간단명료하게 설명한다. 어려운 전문술어는 산뜻한 판서와 함께 그림으로 이해를 돕도록 해주었다. 이렇듯 완벽한 교재 준비, 결강 없는 충실한 강의, 쉽고 명료한 그의 강의 내용은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이학부의 명강의로 소문나 있었다.
3) 연구에 대한 철저한 준비
강 박사님은 일본에서 교육을 받았지만, 세계 제2차 대전 후 생물학 연구에 대한 중심축이 미국으로 옮겨진 뒤로는 새로운 학문을 수혈하고 첨단 실험 기술을 습득하여 빠르게 변화하는 핵심 연구 주제에 적응, 대처하기 위해 세 번씩이나 미국의 유수한 대학과 연구소에 장기간 단신으로 유학했다. 또 많은 학술회의나 워크숍에 참가하여 연구 논문을 발표하고 저명한 외국 학자들과 교분을 두텁게 하면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는데 애를 썼다. 그래서 그의 연구실은 1960~1970년대 걸쳐 우리나라 세포학과 유전학 연구의 본산지로써 언제나 앞서가는 새로운 연구결과를 외국 학술지에 발표하곤 하였다.
세계적인 학문적 흐름에 적응하기 위해 그는 외유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최근 문헌을 마이크로필름에 담아 오고, 또 새 실험 테크닉을 손수 습득하여 대학원 학생들에게 전수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에 소모되는 시약과 실험 기구와 재료는 귀국하는 여행가방 속에 꾸역꾸역 싸 넣어 가져왔다. 또 세포배양이나 자기방사법에 필요한 혈청, 배양액, 특수 필름의 구입을 위해서는 여행 경비를 절약해서 얼마간의 미화를 미국 현지의 제자에게 비축해 놓고 필요할 때 사서 보내주도록 조치하였다. 외화 송금이나 시약의 수입이 불가능했던 빈곤한 시대에 연구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이와 같은 비공식적인 경로밖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4) 신언서판
강 박사님은 많은 저서와 역서를 남겼고 수필, 논설, 기고문도 적지 않다. 그런데 그 모든 문체가 쉽고 평이해서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쓰는 탁월한 문장력을 지닌 분이다. 그의 글에 눈길이 가면 그 끝을 보지 않고서는 뗄 수 없는 강한 흡인력과 호소력을 지닌 걸출한 문장이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가 쓴 원고나 편지의 글씨체는 그의 곧은 성품을 보여 주는 것처럼 획 하나 하나가 반듯하다. 원고지 몇 백 장을 써도 그 첫 자와 끝 자의 모양이 한결 같고, 아무리 급하게 쓴 글이라도 흐트러짐이 없다. 어떤 서예가는 평하기를 독특한 개성미와 정교함이 균형미로 어우러진 명필이라고도 했다. 그래서 사람의 필적만 보아도 그분의 성격, 용모, 행실까지도 짐작하게 한다고 했던가? 
더욱이 글을 쓰다 파지가 생겨도 함부로 구겨 버리는 일 없이, 모두 모아 두었다가 그 뒷면을 다른 용도의 연습장으로 썼고, 그러다 글씨 쓰는 종이로서의 용도가 다 하면 반듯이 접어 마지막에는 휴지로 쓰는 철저한 근검절약형의 본을 보이기도 했다.
강 박사님을 기억하는 많은 분들은 그분이 암기력과 기억력이 특출한 분이라고 입을 모은다. 평소에 말이 적고 무뚝뚝한 편이지만 같이 어울려 흉금을 터놓을 수 있는 분위기가 되면 ‘대하지변’의 구수한 화술을 쏟아 놓는 데는 따를 자가 없다. 유머 감각과 위트가 뛰어나 생활 주변의 작은 일도 그의 가슴속에 담겼다 나오면 아름다운 동화처럼 승화되어 재미있고 아름답게 표현되기 때문이다. 
그는 한번 믿는 사람이면 끝까지 믿고 돌보와 주는 분이고, 약속한 일은 어떤 일이 있어도 지키는 것이 천성이시다. 도무지 꾸밀 줄을 모르고, 세속에 영합하지 못하는 곧은 성품, 그래서 우직하리만치 소박한 인품, 그러나 한번 옳다고 결정한 일은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밀고 나가는 추진력과 일에 대한 강한 집념은 그토록 많은 업적을 낼 수 있었던 바탕이 아니었나 싶다. 이러한 성품은 학생시절 전국 투포환 대표 선수로 다져진 강인한 체력이 밑받침되기도 했을 것이다.
예로부터 선비의 기준으로 정한 신언서판 (身言書判)이라는 말이 있다. 즉 신 (身)은 신체가 건전하고 용모가 반 듯 해야 하고, 언 (言)은 언사가 점잖고 명확해야 하며, 서 (書)는 필치가 좋고 명문장가 이어야 하고, 판 (判)은 생각이 바르고 사물에 대한 판단이 정확해야 한다는 뜻이다. 감히 판단컨대 하곡 강영선 박사님은 선비로서의 자질을 모두 갖춘 대 학자이시다.
3. 연구 업적
1) 업적개요
강 박사님은 1943년 북해도제국대학 졸업논문 발표를 시작으로 정년을 맞은 1982년 까지 연구생활 39년간 학술논문 158편, 저서13권, 역서 4권 등 총 175편(권)의 업적을 남겼다. 이 중 학술논문을 분야별로 보면 세포학 24편, 세포유전학 52편, 집단인류유전학 42편, 초파리유전학 (분류, 생태 포함) 24편, 집단동물유전학 6편, 생리학 5편, 그리고 분류, 생태학 분야 논문이 4편이 된다.
158편의 논문에는 원저 133편, 국제학술회의 프로시딩 14편, 보고서 7편, 그리고 종설 4편이 포함된다.  분야별 발표 논문 수에서 보듯 강영선의 학문적 주된 관심과 업적은 세포유전학 분야에 있었고, 다음이 집단인류유전학, 그 다음이 초파리유전학에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강 박사님은 염색체 연구의 세계적인 권위자인 마끼노 교수의 지도를 받았다. 그러나 대학 졸업논문을 포함하여 해방 때까지 북해도제국대학 소속으로 출판된 9편의 논문 중 단 1편만이 염색체 관련 논문이고, 그 외는 모두 쥐 난자의 성숙, 수정 및 다난성 여포에 관한 논문이어서 그의 학문적 출발은 초기발생학의 세포학적 연구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는 본인이 희망했던 핵심 학문영역인 염색체 연구에 접근하지 못했음을 뜻한다.
 그러나 그는 귀국 후 최악의 연구 여건 하에서도 염색체 연구에 대한 집념을 버리지 않고 1950년대에는 마이크로톰에 의존한 곤충의 핵형 연구를 시작으로 하여, 1960년대 초에는 당시 최고의 하이테크인 세포배양 기술과 공기건조법을 염색체 연구에 도입하였다. 이어 일본에 앞서 현미자기방사법을 이용한 배양세포 염색체의 DNA합성과 DNA 상대량 연구 등 독자적인 영역을 개척하여 세계적인 세포유전학자로 성장, 초기의 학문적 불운을 씻을 수 있었다.
2) 주요 업적 내용
(1) 세포학
1945년 28세의 젊은 경성제국대학 교수로서 해방 후 불모지 조국에서 시작한 강영선의 학문적 행보는 우선 북해도대학에서 수행한 연구 주제의 연속선상인 “쥐 난자에 대한 세포학적 연구”였다. 그는 열악하기 짝이 없는 연구 환경 하에서도 6.25 동란이 나던 1950년까지 7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이를 정리하여 제출한 「서속난소의 이상여포에 대한 세포학적 연구」라는 논문으로 그는 1953년 11월 서울대학교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 논문에서 그는 쥐에서는 다란성 여포의 출현이 드물다는 이전 연구자들의 결과에 대한 반박과 함께 그 원인에 대해 밝혔다. 그에 따르면 쥐의 다란성 여포는 비교적 빈번하게 일어나며, 그 원인은 난소에서 난자와 여포가 형성되는 초기에 여포에 들어있던 한 개의 난자가 분열하여 두개 이상의 난자를 형성함으로써 다란성 여포를 형성한다는 것이었다. 이 논문은 우리나라 생물학계의 박사학위1호 논문이다. 비슷한 시기에 미국 Cornell 대학에서 영양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김호직, 전북대학에서 식물분류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정태현이 전부였던 시절이다.
1943년부터 1965년까지 계속된 세포학에 관한 24편의 논문 중 14편이 그의 단독 논문으로 일본과 국내 학술지에 발표되었다.  1960년대 들어와 김성례 등과 함께 쥐 다난성 여포에 미치는 호르몬과 방사선의 영향에 대해 발표하고, 또 박상대 등이 가담하여 성염색질의 출현 빈도에 대한 세포학적인 연구로 새로운 영역을 넓혀 나갔다.
 (2) 집단인류유전학
6.25 동란 중 강 박사님이 소속한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이학부 청량리 교사는 전쟁 폭격으로 완전히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읽을 책도 실험 시설도 전무한 상황에서 그가 선택한 최선의 방법은 미국 유학으로 새로운 학문적 돌파구를 찾는 것 이었다. 다행히 문교부의 추천을 받아 미국 스미스먼트 교환 프로그램으로 1954년 7월부터 일 년 간 캘리포니아대학 버클리 캠퍼스 (UC, Berkeley)의 세계적인 유전학자 골드슈미트 (Goldsmidt)와 커트 스턴(Stern) 교수의 연구실로 미국 유학을 하게 된다.
여기서 그는 미국 대학원 교육 시스템에 대한 많은 것을 체험하였다. 특히 고가의 장비와 연구비 없이 통계 자료 분석만으로도 연구가 가능한 집단인류유전학 분야의 중요성을 알게 되고 이를 도입, 개척하여 이 분야에서 세계적인 업적을 쌓아 나갔다.
1954년부터 1969년까지 수행한 한국인 집단의 쌍생아 빈도, 출생 성비, 출산력, 출생낭비, 미각 역치, 미맹, 색맹 등에 대한 한국인의 독특한 인류유전학적 데이터를 수집, 정리, 분석하여 35편의 논문을 Eugenics Quarterly ('59, '67a,b), Human Biology ('59, '62), Jap J. Human Genetics ('62) 등 저명 국제학술지에 발표하였다. 뿐만 아니라, 제10차 국제유전학회 (캐나다 몬트리올, '58), 제2차 국제인류유전학회 (이태리 로마, ’61), 그리고 일본유전학회 (일본 동경 '62)등에 참가하여 연구 결과를 직접 발표함으로써 세계 학계의 관심을 모았다.
 그 당시는 전 세계적으로 인구 폭발의 위협이 가장 심각한 문제였고 우리나라에서도 정부 차원에서 산아 제한과 가족계획을 권장하던 때였다.  따라서 이러한 한국 여성의 출산력이나 출생 낭비 등 인구 변동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들에 관한 연구는 인구 증가의 생물학적 요인을 분석한 것이어서 정부 정책 수립 방향에도 많은 기여를 하였다.  이 업적은 또한 Curt Stern의 인류유전학 교과서에 잘못 인용된 한국인의 집단유전학적 자료를 바로잡은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15년간 계속된 인류 집단유전학 연구는 강영선의 최다 공저 기록을 남긴 조완규 (36편)의 절대적인 기여가 있었고, 그 외 이웅직, 이석우, 이인세, 유경자, 박수지, 연근성, 우근형 등이 참여하였다. 한국인 집단을 대상으로 한 인류유전학 분야의 독보적인 업적은 「한국인 집단의 생물학적 연구(Chosen Gakuho, '61)」로 집대성되어 1960년 11월 그의 모교인 북해도대학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받는 영광을 안았다.
또한 1971년부터 1978년까지는 한국인 집단에서 6-포도당인산가수분해효소 결핍, 무카탈라아제 혈전, 저카탈라아제 혈전, 혈액형 등 유전 형질의 출현 빈도와 분포에 대한 6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여기에는 이정주, 백상기 등이 참여하였다.
 (3) 초파리유전학
1933년 미국의 모건(Thomas H. Morgan)은 초파리의 잡종 교배 실험을 통하여 유전자가 염색체내 선상 배열하고 있음을 밝히고 아울러 염색체 지도 작성법을 개발하여 유전자의 염색체설을 확립하였다.  이러한 공로로 그는 유전학 분야에서 최초로 노벨 생리학․ 의학상을 수상함에 따라 초파리유전학은 유전학의 핵심 분야로 부상하게 된다.
 이러한 학문의 국제적인 흐름을 일찍부터 감지한 강 박사님은 집단인류유전학에 이어 다음은 초파리유전학 분야를 개척하기로 하였다. 이를 위해 그는 북해도제대 동기동창이자 신호대학 조교수로 있는 초파리유전학자 가와배 (川邊昌太)의 소개로 그 대학에서 초파리유전학을 전공한 재일교포 정옥기를 초빙하여 이 분야의 독립된 영역을 개척해 나갔다.
 1958년에 첫 논문을 낸 초기에는 분류, 생태 연구에 치중하여 수많은 미기록 종과 1개의 신종도 발견하여 13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이어 염색체 돌연변이, 방사선 감수성 분야의 연구도 발전시켜 1971년 까지 초파리 유전학의 세계적인 흐름에 걸맞는 논문 11편을  초파리 관련 국제학술지인 DIS (Drosophila Information Service) 등에 발표하였다. 여기에는 이혜영, 이정주, 방규환, 문광웅, 박은호 등이 차례로 가담하였다.
 (4) 세포유전학
전체 발표논문수의 1/3에 해당하는 52편의 세포유전학 논문은 대부분 염색체에 관한 것으로, 이를 다시 세분하면 유도염색체이상 및 DNA 합성 양상 21편, 사람염색체 및 핵형 13편, 동물염색체 및 핵형 11편, 그리고 어류염색체 핵형 보존 및 DNA 상대량 7편이 된다.  강영선의 대표적인 업적은 아무래도 암의 생물학적 기초 연구를 다진 유도염색체이상과 DNA 합성 양상 그리고 핵형보존과 DNA 상대량 분야의 연구일 것이다.
강 박사님은 1960년 11월부터 다음해 9월까지 국제원자력기구 (IAEA)의 연수 훈련비 지원으로 두 번째 미국 유학길에 올라 보스톤 외곽에 있는 우스타 실험생물학연구소의 스톤 (David Stone) 교수의 지도를 받게 된다. 여기서 그는 세포배양과 공기건조법에 의한 동물 세포의 염색체 표본제작법을 익히고, 각종 호르몬 처리에 의한 염색체의 수적 변화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이 기회는 그의 염색체 연구가 세계적인 수준으로 발 돋음 하게 된 전기가 된 것이다.
그의 첫 번째 연구 성과는 자궁경부암에 기원을 둔 HeLa 세포에 디옥시코티코스테론, 테스토스테론과 같은 스테로이드 호르몬을 처리하여 호르에 민감한 세포주와 저항성인 세포주로 분리하고, 그 원인을 추적한 결과 호르몬 민감성 세포주는 종족염색체수가 74를, 저항성인 세포주는 68을 나타내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였다(Endocrinology, '62). 또한 HeLa 세포에 특정 세포 추출물을 처리함으로서 본래의 종족염색체수 보다 많은 138과 148 염새체수를 나타내는 새로운 세포주를 분리하는데 성공하였다(Nature, '64).  이는 스테로이드 호르몬이나 세포추출물이 형질전환을 일으키는  유전독성 물질로 작용할 수 있음을 입증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뿐만 아니라 Chinese hamster 세포에 사세포 추출물을 처리할 경우에도 염색체의 수적 변이가 일어남을 발견하여 이를 제16차 국제동물학회(미국 워싱톤 D.C., '63)에서 발표하였다.
 더욱이 박상대와 공동으로 염색체의 DNA합성을 정량화 할 수 있는 최첨단 현미자기방사법을 개발하여, 이 방법을 이용하여 일차배양한 사람의 태아 신장세포를 재료로 테스토스테론과 푸로제스테론의 영향을 조사한 결과, 이들 홀몬에 의한 염색체의 수적 이상은 물론, 구조적인 이상도 유발되고(La Chromo., '66), 세포주기의 G2-시기가 현저히 지연되며, 또한 두 상동 X-염색체간에 DNA 복제가 비동시적으로 일어남을 발견하였다(Can. J. Genet. Cytol., '68).  이 같은 연구 결과는 전리방사선을 처리한 경우에도 같은 양상을 나타내며, 특히 X-선이 염색체의 DNA 합성을 억제하고, 염색체이상이 G2-시기에 최대로 유발됨을 발견하여(Rad. Res., '69) 이를 제12차 국제유전학회(일본 동경, ‘68)에서 발표하였다. 이러한 연구 결과들은 유전독성물질에 의한 염색체이상등 유전체의 불안전성이 DNA 합성 억제와 세포주기의 지연과 연관되어 있음을 밝힌 중요한 업적으로 평가된다.  
이들 연구는 1964년에 시작된 IAEA의 1차 3개년 간 연구비 지원에 의한 「사람의 정상 및 암세포의 방사성 감수성에 관한 연구」의 일환으로 이루어 진 것이다. 이 연구에는 하두봉, 김영진, 박상대, 강현삼, 이정길이 참여하여 미국, 일본, 캐나다 등에 5편, 국내에 7편, 모두 12편의 논문이 발표되었다. 이 같은 연구 성과는 IAEA로 부터 다시 2차 2년 간 연구비를 계속 지원받는 행운을 안았으며, 또한 과학기술처 설립 기념으로 지원된 정부의 대형  연구비도 받게 되어 국제 수준의 연구를 계속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유도염색체 이상에 관한 연구는 그 후 X-선, 자외선, 32P 등 방사성 동위원소와 FUdR, 5-BU, MMS, Actinomycin 등의 영향을 추구하는데 까지 확대 되어 무두 21편의 논문이 발표되었다 (CIS, '67a,b; '73).
또한 사람의 핵형에 관한 연구는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염색체 이상에 의한 선천성 이상질환인 다운증후군 (Down Syndrome) 과 터너중후군 (Turner's Syndrome)에 대한  핵형이 밝혀지고, 또한 자궁경부암과 백혈병 환자의 핵형 분석을 통한 염색체 이상, 치료용 방사선을 처리 받은 암환자의 정상세포 염색체 이상도 보고되었다.  동물의 핵형에 대해서는 한국산 여치과 및 직시류 곤충 3종, 물두꺼비 1종, 설치류 3종, 진돗개 등 포유류 7종의 핵형을 분석 발표 하였다.
어류세포유전학 연구는 1973년부터 정년 직전인 1981까지 강영선이 개척한 마지막 연구 주제이다. 이 연구는 그와 북해도제대 동창이자 관서학원대학 교수로 어류 염색체 연구를 해오던 오지마 (小鳥吉雄) 교수의 협력으로 이루어졌다. 강 박사님은 박은호를 오지마 연구실에 보내 현미분광측광법을 비롯한 어류의 세포유전학적 연구에 필요한 기술을 습득하도록 했다. 
박은호가 귀국하면서 시작한 연구는 먼저 한국산 담수어류 4종에 대한 염색체 및 DNA 상대량을 조사하여 세포유전학적 특징을 계통학적 측면에서 고찰한 논문을 발표하였다 (CIS, '73,'74). 뿐만 아니라 어류 세포배양기술을 독자적으로 개발 (Jap. J. Genet., '75)하여, 이 방법으로 어류의 핵형 보존과 DNA 함량과의 관계를 규명(Science, '76) 하였으며, 또한 어류에 ZW 성염색체가 존재함 (Cytogenet. Cell Genet., '79)을 확인함으로써 어류세포유전학 분야에서도 큰 업적을 남겼다.
 (5) 기타
6.25 동란 후 강 박사님은 가능한 여건 하에서 할 수 있는 다양한 연구 주제에 대해 연구를 진행하였다. 이중 생리학 관련 연구는 1954년부터 1968년까지 항생물질이 혈액 상에 미치는 영향, 원생동물의 X-선 상해에 미치는 항생물질의 영향, 도룡뇽 초기발생 단계의 유리아미노산 분석, 배양한 암세포주의 산소 소비량 및 라이신 흡수에 미치는 X-선의 영향 등 5편의 논문이 발표되었다. 여기에는 조완규, 강만식, 하두봉, 한원택, 안경자 등이 참여하였다.
또한 분류생태학적인 연구는 초파리 분류이외에 1962년부터 1981년 정년 직전까지 짚신벌레의 미기록종, DMZ의 특산 동물의 생태계, 동해의 만각류 분류상등 대한 4편의 논문을 김훈수, 강현삼, 백남극, 김일회 등과 공동으로 발표하였다.
3) 학술활동과 수상
1945년 12월말 우리나라 최초의 생물학 관련 학술 단체인 조선생물학회가 창립되던 날, 강 박사님은 “동식물의 배수성에 관한 세포학적 연구”라는 특강을 통하여 혜성처럼 우리나라 생물학계에 등단한다. 당시 분류학 논문이 거의 전부였던 시절, 실험생물학을 기초로 한 염색체에 관한 내용은 경이 그 자체였다. 이는 오늘날 화려한 바이오시대를 연 우리나라 유전체 연구의 효시로 기록되는 기념비적인 학술 행사였기도 하다.
그는 조선생물학회의 초대 회장 정태현, 부회장 조복성을 도와 실무간사로서 초창기 학회 설립에 참여하고, 그 후 1957년 한국동물학회가 설립된 뒤에는 조복성에 이어 2대(1959-60), 6-7대(1963-66) 및 10대(1968-70) 회장, 그리고 한국생물과학협회 7대(1974-78) 협회장을 역임하면서 우리나라 생물학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또한 강 박사님은 1954년 3월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생물학과 졸업생으로 구성된 생물학연구회가 발간한 우리나라 최초의 생물학 학술지인 「생물학연구」에도 적극 참여하여 논문을 발표하였다. 또 동물학과 설립 후에는 「Zoologica」를 발간하여 동물학과 교실원들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뿐만 아니라 사단법인 한국자연보존협회장(1965-74), 국제생물과학연구프로그램(IBP) 한국위원장(1965-74), 서울특별시 지방문화재부위원장(1972-82), 한국문화재보호협회 이사 및 서울특별시 지부장(1972-79), 한국자연보존협회 이사 및 서울. 경기 지부장(1974-82), 자연보존중앙협의회 위원(1977-81) 으로 활약하면서 우리나라의 자연보존 운동을 시작하고, 한국 휴전선 비무장지대(DMZ)의 독특한 생물상 파악에 진력하였다. 또한 생물의 생산성과 인류복지 향상을 위한 국제 생물학적 기초연구 사업을 이끌어 5년간 IBP 참가자 전원이 28편의 논문을 발표하는 실적을 올렸다. 또한 생태계 보호 및 문화재 보존을 위한 사회 봉사활동에서 심혈을 기울였다.
강 박사님의 국제 학술활동은 그 연배나 시대적 환경에 비해 대단히 왕성하였다. 1961년 9월 이태리 로마에서 개최된 제2차 국제인류유전학회 논문 발표를 시작으로 1981년 7월 제7차 대학교육 개선에 관한 국제회의 때까지 20년간 27회의 국제학술 회의에 참가 하여 논문 발표와 학술 정보교환 및 세계적인 학자들과 친교를 쌓아 그의 학문적 국제화에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강 박사님은 1963년 7월 한국동식물도감 (조류편)으로 대한민국학술원상 저작상을 수상하였다. 그리고 1970년 4월에는 과학기술상 대통령상을, 1972년 10월에는 하은생물학상을 수상하였다.
하은생물학상은 당시 생물학계의 유일한 상으로 그가 55세 때 수상한 공적 사항을 보면 원저 논문 145편, 저서 8권, 역서 2권 포함 총 155편 (권)의 업적으로 한국 생물학 발전에 크게 공헌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특히 원저 논문의 내용은 암의 세포유전학적 연구 32편, 포유동물 난자의 세포학적 연구 21편, 한국인의 유전학적 연구 37편, 초파리의 유전학적 연구 24편, 기타, 동물의 염색체에 관한 연구 31편으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세포학과 유전학의 업적을 쌓은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1971년 4월에는 국민훈장 동백장의 서훈을, 1976년 10월에는 서울대학교 30년 근속상을, 그리고 정년퇴임한 1982년 8월에는 국민훈장 무궁화장의 서훈을 정부로부터 받았다.
4. 맺는말
강 박사님은 세계 제2차 대전과 6․25동란 등 어려운 여건 하에서 학문을 시작하였으나, 역경을 딛고 발군의 업적을 쌓아 자연계 최고 권위의 학술지인 ‘네이처’와 ‘사이언스’ 등에 이미 30-47년 전에 논문을 발표하여 후학들이 추종하기 힘든 독보적이고도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1945년 경성제국대학 예과부 교수를 시작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생물학과를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에 창설하여 34년간 봉직하고, 마지막 3년 반은 강릉대 초대 학장으로 지방대학 육성에 힘쓰다가 정년을 맞았다. 정년 후에도 수원대학교 대우교수로 있으면서 유전학 강의를 놓지 않고 후학 양성에 진력했다.
만년에 암수술을 받은 뒤 급속히 쇠약해 가는 중에도 대한민국학술원의 ‘생명복제’ 주제의 국제학술대회를 주관하고 80세 병든 노구에도 기조강연을 몸소 하여 후학들에게 깊은 감명을 남겼다. 평생 학문에서 벗어난 일이 없었던 선생은 떠나기 얼마 전 까지도 ‘생명 복제의 윤리 문제’에 대한 정부의 위탁 과제를 수행하다가 끝을 맺지 못하고 유명을 달리했다.
강 박사님은 해방 때까지 기초생물학을 전공한 대학 졸업자 (학사학위 소지) 7인중 유일한 동물학 전공자 (‘43)이고, 우리나라 생물학계 박사1호 (’53)이며, 대한민국학술원 최초 선출직 회원 (‘54)이다.  1945년부터 1982년까지 37년간 양성한 그의 제자는 우리나라 생물학계 각 분야에 걸쳐 거목으로 성장하였다.
강 박사님의 최다 공동 연구자 조완규는 집단인류유전학을 발전시켜 발생생물학, 생식생리학, 생식내분비학의 독립된 영역을 개척하였으며, 강만식은 방사선생물학과 생물물리학을, 하두봉은 동물생리학, 생화학, 동물분화분자생물학을 개척해 나갔다. 김영진, 이혜영은 동물세포유전학과 인류세포유전학을 넓혀나갔고, 이정주는 생화학유전학을 기반으로 해서 인류분자유전학을 발전시켜 나갔다. 또한 박상대는 세포유전학에서 분자세포생물학, 암세포생물학으로, 박은호는 어류세포유전학을, 강현삼은 미생물분류학에서 미생물유전학으로, 김훈수는 동물분류학을 계통분류학으로 양서영은 계통분류학을 생화학분류학으로 발전시키는 힘을 기우렸다.
 그리하여 강 박사님의 세포학과 유전학의 뿌리는 그의 가르침을 받은 많은 제자들이 새로운 줄기를 형성하여 각각의 독립된 분야로 성장, 발전시켜 오늘날의 화려한 바이오 시대를 연 초석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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