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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약학부] 故 홍문화 박사 회상록

이름 |
관리자
Date |
2014-01-03
Hit |
8162
  집필자: 김병각 (서울대학교)


 


 



 


 


 大河 洪文和교수님은 한국 약학계를 대표하는 과학자이며, 탁월한 지도력, 훌륭한 인격, 원만한 대인관계 뿐만 아니라, 약학 연구와 교육의 발전, 보건행정의 향상 및 과학의 대중화에 커다란 불멸의 업적을 이룩하셨습니다.
  홍교수님께서는 1916년 5월 1일 평안남도 안주(安州)읍에서 출생하셨으나 3세때 가족이 평양으로 이사하게 되어 초등학교와 평양제2중학교를 평양에서 마치셨습니다. 그 당시 평2중은 입시경쟁율이 평양에서 제일 높았습니다.
  1937년에 경성약전(서울대 약대 전신)을 수석으로 졸업하신후 모교에 조교로 4년간 근무하셨습니다. 약의 임상 효과에 관심이 많아 그 동안 독학으로 공부하여 <의사면허자격시험>에 합격하여 의사면허를 받으셨고, 1942년부터 3년간 경성제대부속병원(서울대학교 병원 전신) 내과에서 수련의로 근무하셨습니다.
  2차대전이 끝나고 해방이 되자 일본관리들이 한꺼번에 물러나게 되어 홍교수님이 <전매청 제염시험장>장장으로 취임하셨습니다. 그 당시 소금, 담배 및 홍삼이 전매품이어서 일반 상인들이 제조할 수 없었습니다. 염전과 시험장이 경기도 주안에 있었는데 그 당시 주안에는 병원이 없었습니다. 직원들이나 그 가족들이 병에 걸리면, 진료가방을 들고 각 집에 찾아가 무료로 치료해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홍교수님의 장녀 이름이 德惠로 지었고 장남이름이 朱安으로 지으셨습니다. 직원들의 결혼식에 주례로도 봉사하셨습니다. 30대 초반부터 주례를 서다보니, 광복 30주년 되던 해에 <서울신문사>가 그 기념행사의 일부로써 최고 기록들을 조사하여 보았더니, 결혼 주례 최대 기록보유자가 홍교수님이셨습니다.
  1950년에 약대가 서울대학교로 합병되자 홍교수님이 조교수로 모교에 돌아왔습니다. 1953년에 교무과장으로 계실때 약대의 학보로 <약원>창간을 적극 추진하셨으며, 서울대 단과대학 학보중 가장 역사 깊은 간행물이 되었습니다. 6․25동란이 휴전되어 서울 을지로 6가에 있었던 본교로 돌아왔을 때, 우등생들의 동아리모임인 <약학연구회>를 열심히 후원해주셨습니다.
  1955년 미국 파이퍼 약학교육재단의 연구비를 받고 Purdue대학교 약대 Martin교수 지도하에 연구하셨는데, 1년만에 석사논물을 완성하여 석사학위를 받는 진기록을 남기셨습니다. 그때에 시작한 실험을 귀국후에도 꾸준히 추진하여 드디어 1962년에 서울대학교 약학박사 제1호의 테이프를 끊으셨으며, 동시에 대학민국 약학박사 제1호이기도 하였습니다. 그 뒤를 이어 다른 교수들도 차례로 박사학위를 받도록 적극 도와 주셨습니다.
  1961년 5․16혁명이 성공한 후, 군사정부에 차출되어 문교부 과학기술국장으로 1년간 파견 근무한 적도 있었습니다. 1962년 약대학장으로 임명되어 3년간 약대의 발전과 약학 교육 향상에 적극 기여하였습니다.
  홍교수님의 무기약품제조화학 강의는 약대 3대 명강 중의 하나이었습니다. 그 밖에 물리화학과 약학 영어도 강의하셨습니다. 홍교수님의 영어실력과 漢文실력은 특출하시어, 글을 쓰실 때 한문으로 된 名文을 인용하시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홍교수님이 소금에 관한 전문지식이 해박하시고, <약원> 제2호에 <소금>이라는 시를 지어 발표하셨기 때문에 약대생들이 홍교수님을 <소금박사>라는 애칭으로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홍교수님의 연구실에는 미국의 노벨화학상 수상자인 Linus Pauling교수의 초상화가 걸려있었는데, 홍교수님이 손수 그리신 油화이었습니다. 그림뿐만 아니라 조각도 직접 창작하여 <조선미술전>에 출품하시면 입선되곤 하였습니다.
  1967년에 대한약학회 회장으로 피선되어 약학회의 발전에 기여하셨는데, 서울대 약대 교수중에서는 한구동 교수에 이어 두 번째로 회장직을 맡으신 것입니다. 1966년 국립보건원장으로 임명되어 3년간 보건행정의 최고 수행기관에서 의약품 허가, 전염병 관리, 식품품질관리, 각종 국가 시험관리 등의 업무를 향상시키셨습니다.
  아세아 각국의 약사회들이 모여 창설한 <아세아 약학 연맹>의 부회장으로 취임하시어 각국 간의 정보 교류와 협력을 촉진하였고, 그 총회를 서울에 유치하여 성대하게 개최하였습니다. 1970년부터 <아세아 약학회의> 의장으로 취임하여 7년간 학술교류를 적극 추진하였습니다.
  1978년에 고려인삼학회 회장으로 피선되어 옛날의 전매청 직원들의 협조로 학회 활동을 적극 추진하여 초창기의 기초를 튼튼히 만드셨습니다. 1970년에는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의 부회장으로 추대되셨습니다. 1977년 과학저술인협회 회장으로 피선되어 과학의 대중화에 앞장 서셨습니다. 텔레비전과 라디오 방송국에서 약과 건강에 관한 프로가 필요하면 꼭 홍교수님을 모셔다가 출연시켰습니다. 한번은 방송국PD에게 왜 홍교수님만 출연시키느냐고 물었더니, 그 대답이 간단했습니다. 홍교수님은 절대로 NG가 안나오고 한번에 촬영이 끝난다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일간지와 주간지에도 약과 건강에 관한 상식을 고정 칼럼으로 연재하였으며 이를 모아서 책으로 출간하셨으니 총 20여권의 단행본으로 나와 있으며 그 일부는 베스트셀러에 오르기까지 하였습니다. 한 예로 「동의보감」을 현대식으로 해석한 「신동의보감」이 있습니다.
  물론 보건사회부 <대한약전>편찬위원회 위원장 및 중앙약사심사위원으로 오랫동안 봉사하셨습니다.
  약사와 의사 면허를 겸비한 분이 많지 않아서 특별히 인기가 높았으며,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대기업사원교육에 강사로 전국 방방곡곡에 불러다니셨습니다.
  국립보건원은 보건사회부 소속기관이어서 원장으로 발령받은 후, 서울대학교에는 사표를 내고 취임하셨었습니다. 원장의 임기가 끝나고 나서 쉬고 계실 때, 서울대학교 한심석 총장이 홍박사님을 생약연구소(천연물과학연구소 전신)교수로 1970년 복직시키시어 한약의 과학화 연구에 몰입하셨으며 연구 논문을 연이어 발표하셨습니다.
  1980년에 홍교수님은 대한약사회 제22대회장으로 피선되어, 약사회의 발전에도 기여하셨습니다. 한 예로 그 당시 사용되던 약물을 총망라한 <최신 약물요법>책을 각 약대 교수들을 집필자로 하여, 약사회에서 발간하였습니다.
  홍교수님은 1981년 8월에 정년퇴임하시어 명예교수가 되셨습니다. 그러나 퇴임후에는 방송출연, 교양 강의, 원고 집필, 결혼 주례 등으로 더 바쁘게 지내셨습니다. 홍교수님이 받으신 상이 많지만 그 중의 대표적인 상으로 대한약학회 학술본상(1959년), 약업신문사 동암약의상(1963년), 한국생약학회 학술상, 국민훈장 동백장(1974년), 제 17회 과학의 날 과학기술봉사상(1984년). 아세아약학연맹 공로상(1996년) 등입니다.
  홍교수님이 수집하여 소장하셨던 진귀한 서적 5천여권을 <한독약사박물관>에 모두 기증하시어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홍교수님의 많은 업적들을 필자의 부족한 필력으로 제대로 기술하지 못한 점을 너그러이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홍교수님의 자당께서는 1986년 일요일에 교회에 건강하게 다녀오시고나서 그 다음날 월요일에 98세로 돌아가신 장수혈통이었으므로 홍교수님의 건강을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었습니다. 홍교수님께서는 퇴직하신 후, <보건신문사>편집국장과의 대담에서 마지막 소원이 있다면, 한국 과학자가 노벨상을 받는 것을 보시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홍교수님께서 병환으로 돌아가시고 나니 비통할 뿐입니다.
  약대가 1975년 관악캠퍼스로 이사오기 전에는 연건동 메디칼 캠퍼스내에 있었습니다. 그 당시 학교에서 퇴근길에 종로의 <낭만>에 들려 재미있는 담론을 해주시던 시간들이 영원한 추억으로만 남게 되었습니다. 평소에 홍교수님이 덕을 넓게 펴시어 저 세상에서도 축복받으시리라 굳게 믿고 있습니다.
  가족으로 사모님과 2남 3녀가 있습니다. 장녀와 사위는 의사이고 두사람 모두 의학박사, 2녀는 의사이자 의학박사, 사위는 공학박사, 장남은 서울대 공대 화학공학과를 졸업한 후 공군대위로 제대하고 미국 Purdue대학교 공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현재 캘리포니아대학교 공대 교수로 근무중입니다. 며느리는 서울대학교 약대 졸업생이며 Purdue대학교 약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미국에서 근무중입니다. 3녀는 미술가이며 사위는 의학박사입니다. 차남은 경영학박사이고 며느리는 약사입니다. 박사는 모두 8명입니다. 


A) 논문


1) 홍문화․  장판섭: 한국산 식염중의 불소함량, 약학회지3(1), (1957).
2) 유병설․  홍문화: Glycerin 또는 sorbitol 첨가가 수산화 알루미늄․  겔의 노화에 미치는 영향, 약학회지6(2), (1962).
3) 김양배․  홍문화: 조혈제에 관한 연구(Ⅱ). 지효성 조혈제 제조에 관한 연구, 약학회지8(4), (1964).
4) Moon Wha Hong : Statistical Analyses of Platycodi Radix Prescription, Yakhak Hoeji 19(3), (1975).
5) 홍문화: 한방 처방의 통계적 연구( II ) -인삼배합 한방처방의 통계적 연구. 생약학회지 3(4), 187-197 (1972). 
6) 홍문화: 길경배합(桔梗配合) 한방처방(漢方處方)의 통계적(統計的) 연구(硏究). 생약학회지 5(1), 61-67 (1974). 
7) 홍문화: 우리의 이두향약명(吏讀鄕藥名)이 일본의 본초학에 미친 영향. 생약학회지 3(1), 1-10 (1972). 
8) 홍문화: 한방 처방의 통계적 연구( I ) -생약의 처방 출현 빈도 및 기원 분포. 생약학회지 3(2), 57-64 (1972). 
9) 홍문화: 한국(韓國)의 광물성(鑛物性) 한약(漢藥) (I). 생약학회지 4(3), 105-152 (1973). 
10) 홍문화: 자양강장제(滋養强壯劑). 생약학회지 6(3), 185-190 (1975). 
11) 홍문화: 질경배합 한방처방의 통계적 연구. 생약학회지 5권 1호. 61-72 (1974).
12) 홍문화 : 모려화석의 약물학적 연구. 생약학회지 4권 1호. 9-17 (1973).
13) 홍문화 : 한방 처방의 통계적 연구 ( Ⅰ ) 생약의 처방 출현 빈도 및 기원 분포  생약학회지 3권 2호. 57-64 (1972).
14) 홍문화 : 한방 처방의 통계적 연구 ( Ⅱ ) 인삼배합 한방처방의 통계적 연구 
생약학회지 3권 4호. 187-197 (1972).
15) 홍문화 : 우리의 이독향약명이 일본의 본초학에 미친 영향
생약학회지 3권 1호. 1-10 (1972).


B) 저서
1) 홍문화박사의 건강 장수법, 277pp. 도서출판 한강수(1994)
2) 홍문화: 무기약품제조화학, 동명사(1959)
3) 홍문화: 「신 동의보감」
4) 홍문화: 「약과 건강」
5) 홍문화: 「약이냐 독이냐」, 빛과 향기사
6) 홍문화: 「한국의 상약」
7) 홍문화: 「신역 동의 보감」
8) 홍문화: 「건강하게 사는 지혜」
9) 홍문화: 「무엇을 어떻게 먹어야 하나」 거암사
10) 홍문화: 「약사산고」 476pp. 동명사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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