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부] 故 최상업 박사님 회상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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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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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최상업 박사님에 관하여 “한국 브리태니커 온라인” 에는 아래와 같이 수록되어 있다.
崔相嶪: 화학자. 1945년에 일본 교토대학[京都大學] 화학과를 졸업한 후, 1956년에 미국 퍼듀대학교에서 이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45~60년 서울대학교 전임강사·조교수·부교수를 지냈으며, 1960년 문교부 기술교육국 국장, 원자력연구소 소장, 1961년에 연세대학교, 1962년에 미국 보스턴대학교, 1963년에 한양대학교 교수를 거쳐 1966~87년에 서강대학교 이공대학 교수, 1968~74년에 서강대 대학원장, 1973~79년에 동(同)대학교 부총장, 1985년 아시아 화학연합회장을 지냈다. 현재 서강대 명예교수, 화학부문을 대표하는 학술원 회원으로 있다. 1981년에 11대 국회의원(민주정의당 전국구)을 지냈다. 녹조근정훈장(綠條勤政勳章), 국민훈장 동백장과 국민 모란장을 수상했다. 주요저서로는 <일반화학〉이 있으며, 번역서로 <핵화학 및 방사화학〉·〈물리화학〉 등이 있다.
누가 언제 어떻게 정리한 것인지 모르지만 특별히 틀린 곳은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여러 가지 면에서 매우 어설픈 자료다. 현재 서강대학교 명예교수라고 기술된 것을 보면, 2004년 작고하기 전에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위의 연보와 한국 브리태니커의 소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故 崔相嶪 박사님은 많은 대학에서 연구하고 가르치셨다. 그리고 우리나라 여러 과학기술 관련 단체를 위하여 일하셨고, 국회의원으로도 활동하셨다. 선생님께서 사셨던 당시 사회적 여건이 선생님을 그렇게 만들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혹자는 말하기를 너무 이 곳 저 곳 다니면서 여러 자리를 하시느라고 연구에는 소홀하셨던 분이라고 평하지만, 거절을 못 하시는 성품이기 때문에 일을 맡았다가, 적성에 맞지도 않을 뿐 더러 일할 수 있는 여건도 좋지 않아서, 그만 두시면서 갈 곳을 찾으셨던 것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故 崔相嶪 박사님은 운도 좋았던 분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실은 그것도 선생님의 원만한 성품을 잘 나타내는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부잣집 맏아들로 태어나 2차 대전 말기에 일본에 유학할 수 있었고, 경도(Kyoto)대학에서는 우리나라 과학계의 거목 이태규 박사님을 만나 지도를 받았고, 한국전쟁 직 후 미국 유학을 할 수 있었으며, 미국 Purdue 대학교에서는 후에 노벨상(1979년 수상)을 수상한 H. C. Brown 교수를 지도 교수로 만날 수 있었다는 사실은 당시 보통 사람들에게는 상당한 행운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선생님은 최소한 10대 때부터 공부는 잘하는 학생이었다. 平壤 第二公立中學校 → 日本의 第三高等學校 理科 → 日本 京都大學 化學科를 거친 엘리트 청년이었다.
선생님이 20대 청년이었던 1945년 2차 대전이 끝나고 우리나라는 일본으로부터 독립하였지만 숨도 돌리기 전에 1950년 6.25 전쟁으로 다시 3년 이상을 혼란과 어려움을 겪었다. 그 시대에, 우리나라 과학기술계에는 전문 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그런 상황에서 선생님께서는 젊은 나이에 대학교수가 되었지만 학자로서 부족함을 느껴 다시 미국으로 유학하여 1956년에 박사학위를 받으셨다. 박사후 연구원으로 계속 연구에 정진하고 있던 선생님에게 국가는 綠條勤政勳章을 수여하고(1960년) 문교부 기술국장으로 데려왔다. 그 만큼 당시 우리나라에는 과학기술계 전문 인력이 귀했던 것 같다. 그 후에도 잠깐 원자력 연구소장(서리)으로 정부의 일을 맡았었지만, 결국 대학으로 돌아 오셨다. 국 내 외의 여러 대학을 거쳐 마지막으로 서강대학에 자리를 잡으셨다.
崔相嶪 교수와 西江大學校 화학과
故 崔相嶪 박사님의 생을 돌아보려면 무엇보다도 20년 이상 근무하셨던 서강대학교 화학과를 빼 놓을 수 없다. 서강대학교 화학과 교수로서 선생님은 비교적 행복한 시간을 보내셨다고 생각된다. 1966년에 서강대학교로 옮기신 선생님은 서강대학교 화학과를 우수하게 만드는데 최선의 노력을 하셨고 보람을 느끼신 것 같았다. 1960년대에 尹能民 박사와 鄭求珣 박사를 유치하면서 그 때부터 서강대학교 화학과 교수진의 면모를 정립하신 것 같다. 전공분야에서 상당한 실력 그리고 인격을 두루 갖춘 사람들을 초빙하여 서강대학교 화학과의 학구적이고 신사풍의 분위기를 만들기 시작하신 것 같다. 필자가 서강대학교 화학과 교수의 일원이 되던 1979년 서강대학교 화학과에는 여섯분의 교수가 계셨다. 尹能民(유기화학 전공), 鄭求珣(분석화학 전공), 卞鍾瑞(유기화학 전공), 白雲基(물리화학 전공), 蘇玄秀(물리화학 전공) 그리고 崔相嶪(무기화학 전공) 교수였다. 1980년대에 한 일간지는 대학 학과 탐방 기사에서 서강대학교 화학과 교수진을 모두 실력 있고 점잖은 신사들이라고 호평을 한 적이 있다. 서강대학교 화학과의 교수진은 당시 국내 대학 화학과로는 유일하게 모두 선진국(미국, 영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한 사람들로 가장 탄탄하였다. 당시 서강대학교는 작지만 알차고 무엇보다도 빼어난 교수진의 학교로 알려졌었는데, 그중에서도 화학과는, 문과대학의 사학과와 함께, 소위 로얄 학과라는 별명까지 있었다. 조금 비판적인 면도 있는 별명이었겠지만, 고 최상업 박사님을 위시하여 당시 여러 교수들에 대한 평가라고 생각한다.  
상당한 화학실력을 갖춘 미국인 교수(Miller 신부 등)가 안식년을 서강대학교 화학과에서 직접 영어로 학생을 가르칠 때도 있어서강대학교 화학과는 상당히 일찍 국제화를 시작하였다고 할 수 있다.
崔相嶪 박사와 서강대학교의 發展 
故 崔相嶪 박사는 1966년부터 1987년까지 21년간 봉직하셨던 서강대학교의 발전에 큰 힘이 되었다. 1966년 한양대학교로부터 서강대학교로 옮기신 선생님은 1968년까지 2년 동안 오직 화학과 발전에 온 힘을 쏟으셨다. 1968년부터 1974년까지는 대학원장 직을 맡으면서, 1960년에 개교하여, 종합대학의 면모를 갖추어 나가는 서강대학교의 대학원 발전에 큰 힘이 되었다. 선진국(일본에서 5년, 미국에서 8년)에서 다년간 가르침과 연구를 해 보았던 경험과 닦은 지식을 바탕으로 우리 실정에 필요하고 이상적인 대학원 모델을 서강대학교에 세우려고 노력하셨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1970에는 國民勳章 冬栢章을 받았다.
1973년부터는 부총장으로(1973 - 1974년까지 1년간은 대학원장 겸임) 서강대학교 전체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셨다. 1960년 서강대학교 개교 후 1980년대 중반까지는 미국인 신부가 총장을 맡았었다. 미국인 신부 총장은 우리말 구사에 어려움도 있고, 여러 면에서 국내 사회 정서에 밝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에 부총장의 역할이 매우 컸던 것이 사실이다. 1960년 개교 후 1970년대 말까지 짧은 기간에 서강대학교는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다. 당시 서강대학교 발전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였던 많은 분들의 노고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여러분 중에 故 崔相嶪 박사님도 크게 한몫을 하셨음은 확실하다. 국내·외 여러 대학에서 다년간 얻은 경험과 지식을 서강대학교 발전을 위하여 쏟아 부었다고 말 할 수 있다. 1968년부터 1979년까지 12년간을 대학원장과 부총장으로 봉직하시는 동안, 서강대학교는 인문 사회 분야 뿐 아니라 자연과학 및 공학 분야에서도 상당한 발전을 이루었다. 당시 국내 대학의 재정적 여건 및 규모로 보아서 집중적인 지원이 필요했던 과학과 공학 분야에 적극적인 투자는 기대하기 곤란하였다. 따라서 할 수 있는 것은 교육의 내실을 다지는 일이었기 때문에, 예를 들어 우수한 교수들을 초빙하고, 철저한 학사관리 등을 통하여 교육풍토 개선에 역점을 주는 정도였다. 교수들은 강의에 충실하고 학생지도에 더 적극적이어서, 서강 고등학교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도 선생님께서 서강대학교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던 1960년대 후반부터라고 생각한다.  
1979년 말 국가비상 사태에서 학교 보직을 떠나 잠깐 조용히 지내시다가 이듬해에 1981년 4월에는 새로 창당한 민주정의당 전국구 국회의원(11대)으로 영입되어 우리나라 과학기술 관련 정책입안에 참여하셨다. 이렇게 여당 국회의원으로 4년간 서강대학교를 떠났다가 1985년에 다시 돌아올 때까지의 4년간을 빼고는 정년퇴직(1987년) 하실 때까지 서강대학교와 화학과의 발전을 위하여 열심히 일하셨다.
化學연구
1939년 平壤 第二公立中學校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日本 第三高等學校理科를 졸업하신 선생님은 그 때 이미 화학자가 되기로 결심하신 것 같다. 당시 일본 京都大學으로 진학한 선생님은 당시 화학과 교수로 계셨던 고 李泰圭 선생님의 문하생이 되었다. 1945년 9월(1945년 8월 15일에 일본은 연합군에 항복)에 화학과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京城大學(후에 서울대학교로 개명) 豫科 敎授 겸 理工學部 講師로 화학 교육과 연구자의 길을 택하셨다.
최초 논문: 선생님의 이름이 共著者의 한 사람으로 학술지에 발표된 생애 최초 논문은, 1945년 日本의 화학 학술지, Rev. Phys. Chem., Japan에 실린 것으로  제목은 “The Effect of Substituents on the Oxidation-Reduction Potentials of Organic Compounds”이며, 故 李泰圭 박사님과 함께 연구하신 것이었다. 고 이태규 박사님은 선생님(최상업)의 日本 京都大學 유학 시절 지도교수였으며,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한 후에 두 분은 함께 귀국하여 국내의 화학발전에 힘을 모았다. 물론 고 이태규 박사님의 지도가 절대적이었다.
선생님의 2번째 학술지 게재 논문도 故 李泰圭 박사님과 함께 연구하신 내용으로, 논문제목(The Effect of Substituents on the Oxidation of Phenols and Amines)으로 보아서, 일본 경도대학 시절 고 이태규 박사님 연구실에서 수행했던 연구 결과인 것 같다. 이 논문은 "우리나라 최초 화학 학술지, “대한화학회지”(Journal of Korean Chemical Society)의 창간호에 실렸다. (1949년 처음 발간된 대한 화학회지 창간 1호의 첫 번째 논문은 故 김순경 교수(1920-2003, 후에 미국 Temple 대학의 화학과 교수로 재직하셨음)의 연구 결과 이었다.
1953년 7월 한국전쟁이 끝나고, 곧바로(1953.9) 미국 유학길에 오른 선생님은 1956년 9월 Purdue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Purdue에서는 Herbert C. Brown 교수와 함께 주기율표의 제3족 원소인 알루미늄(Al)과 갈륨(Ga) 화합물의 반응성을 연구하셨다. 선생님의 박사 학위 지도 교수였던 H. C. Brown 교수는 그 후 계속 또 하나의 3족 원소인 붕소(B) 화합물의 반응성을 연구하여 1979년 Nobel 화학상을 받았다. 
최 박사님이 실질적으로 Purdue 대학을 떠난 것은 1957년이지만, Brown 교수와의 공동연구(제3족 원소, Al 및 Ga에 관한 연구)는 그 후로도 계속되었고, 선생님과 Brown 교수 두 분이 공동저자로 논문이 3편(1960년 1편, 1963에 2편 모두 J. Am. Chem. Soc.에 게재)이나 더 발표되었다. 당시 국내의 연구 여건이 어려웠지만, 연구에 관한 열정을 미국의 Brown 교수와의 공동 연구로 채우셨던 것 같다.
Purdue 대학에서 1년 간 박사 후 연구원 생활을 끝내고, Wisconsin 대학(지도교수, John E. Willard)으로 옮겨서 다시 2년 동안(1959년 9월까지) 박사후 연구원으로 일하는 동안에, Brown 교수와 연구하던 3족 금속 원소 갈륨(Ga) 화합물의 반응성을 계속 연구하셨다. Wisconsin 대학을 떠난 후에도 Willard 교수와의 공동연구는 Purdue 대학의 Brown 교수와의 공동연구처럼 계속되었으며, Willard 교수와 2편의 논문(1962년 J. Phys. Chem.에 1편, 1965년에 J. Am. Chem. Soc.에 1편)을 발표하였다. 
 
새로운 화학에 관심이 크셨던 선생님은, Wisconsin 대학에서 다시 Boston 대학(지도교수, Norman N. Lichtin)으로 옮겨 이곳에서는 처음으로 방사선 분해반응(radiolysis)에 관한 연구를 시작하셨다. 이때부터 최 박사님의 방사화학에 관한 열정이 높았던 것 같다. 흥미 있는 것은, 최 박사님이 발표하신 Radiolysis 관련 발표 논문 중에는 Wisconsin 대학 Willard 교수와 공동 저자로 된 것(1962년 J. Phys. Chem.에 1편)이 있다는 점이다. 고 최 박사님이 Willard 교수를 방사화학 분야로 리드한 것 같다. 1960년에 Boston 대학을 떠난 후에도, Radiolysis에 관한 Lichtin 교수와의 공동연구는 계속되어 3편의 논문(J. Am. Chem. Soc.에 1962, 1963, 1964년에 각 1편 씩)을 발표하셨다.
최 박사님은, 1953년부터 1960년까지 미국 3개 대학에서 3명의 교수(Purdue의 Brown, Wisconsin의 Willard, Boston의 Lichtin)와 연구 경력을 쌓으면서, 그들과의 공동 연구결과 발표는 1966년까지 이어졌다. (Brown 교수와 공동 저자로 된 논문 2편이 1965년과 1966년에 J. Am. Chem. Soc.에 발표된 바 있다.) 연구에 대한 최 박사님의 열정을 느낄 수 있는 점이다.
[최 박사님은 평소 후배 서강대학 화학과 교수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유쾌한 시간을 갖곤 하셨다. 가벼운 술자리에서 하신 말씀 중 하나: 일본 京都大學 학사과정에서는 정확히 20년 연상인 이태규 박사님(1902년 생)을 지도교수로, 미국 Purdue 대학 박사과정에서는 정확히 10년 연상인 Brown 교수(1912년 생)를 지도교수로, Boston 대학에서는 동갑내기 Lichtin 교수(1922년 생)의 박사후 연구원으로 일했다고 하시면서, 그 후로는 계속 10년, 20년, 30년, 40년, 50년 후에 태어난 제자들을 갖게 되었다고 하셨다.]다.]  
Boston 대학에서 방사능을 이용한 화학 분해 반응에 관한 연구 경력을 쌓은 최 박사님은 1960년 귀국 후에도 계속 방사선 분해반응(Radiolysis)에 관한 연구를 하셨고, 국내에서 핵화학(Nuclear Chemistry) 및 방사화학(Radio Chemistry)의 선구자 역할을 하게 되었으며, 원자력 연구소장직을 역임하시게 되었고, 그 후에도 원자력 위원으로 활약을 하시게 되었다.
1960년 영구 귀국 후 선생님이 국내에서 수행한 연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선생님의 연구 분야를 크게 두 분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로, Purdue와 Wisconsin 대학의 연구에서 얻은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하는, 주로 제3족 금속원소 Aluminum과 Gallium halide의 Reactivity, Kinetics, Catalytic Activity에 관한연구가 가장 비중 있는 분야이며, 다음으로, Boston 대학의 Lichtin 교수와 함께 수행했던 분야인, 화학반응 연구에 방사선을 이용하는, Radiolysis에 관련된 연구이었다. 1960년도 중반부터는  본격적으로 연구를 하시면서 제자도 양성하기 시작하신 것 같다. 연구 내용은 주로 대한화학회지에 투고하여 화학회지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1965년과 1970년(J. Korean Chem. Soc.)에는 국내에서는 최초로 수행한 Co-60 Gamma-ray (γ-Ray)에 의한 methanol radiolysis 연구 결과를 발표하였다.  
한편 1968년에는 국내에서 수행한 연구의 내용을 처음으로 미국 화학회 학술지(J. Phys. Chem. 72, 3148 - 3153, 1968)에 발표하셨다. 이 논문의 공저자는, 당시 선생님의 지도를 받았던 故 權五天 한양대학교 명예교수이다. 1960년대에 국내에서 수행한 연구 결과를 당시로서는 수준 높은 학술지 J. Phys. Chem.에 발표한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국내에서 선생님의 연구 범위는 이제 alkaline earth metal에 관한 화학으로 확장되어 1968년에는, 선생님의 지도로 박사학위를 받고 울산대학교 화학과 교수로 재직하였던 배영일 (현 울산대학 명예교수)과 함께 수행한 연구결과가 배위화학의 백과사전 같은 Progress in Coordination Chemistry(Elsevier Publishing Company, New York, 1968, pp. 226 - 227)에 수록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수행한 연구로는 처음으로 Progress in Coordination Chemistry에 실렸던 것이다.
1969년에는 선생님께서 국내에서 이루어진 연구결과를 XXII IUPAC (국제 순수 및 응용화학 연합회) Congress에서 발표하셨다. (논문 목록 31번 참조) 당시 우리나라 화학자가 국제학회에 참석하여 국내에서 수행한 자신의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는 것은 쉽지도 않고 실제로 거의 없었던 일이었을 것이다. 선생님은 무기화학/배위화학 분야에서 당시 국내 화학 연구자의 리더이었다. 1969년대 말에는, 선진국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한 화학자들이 일부 국내 대학에서 연구를 시작하였지만, 선생님만큼 국내에서 수행한 연구 결과를 발표하는 사람은 없었던 것 같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선생님의 연구는 더욱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연구 대상물질을 주족 금속(Ga, Al, Sb, B, alkaline earth metal, 등)으로부터 전이금속(Mn, Ni, Zn, Co, Cd 등)까지 연구 범위를 확장하여 왕성한 연구의욕을 보이셨다. 전이금속 complex에 관한 연구는 당시 대학원생이었던 강준길, 배영일, 이동재 그리고 류석환 등이 함께 수행하였는데, 이들 모두 후에 대학교수가 되었다.(아래 참조) 선생님은 1970년에 대한 화학회지(J. Korean Chem. Soc.)에만 무려 4편의 논문을 발표하였고, 정부 보고서(발표 논문 목록 참조) 및 간행물에도 선생님의 연구 업적을 볼 수 있다. 1970년대에 선생님의 지도를 받았고 연구 논문의 공저자로 나타난 화학자로는 배영일(현 울산대 화학과 명예 교수), 이창환(현 강원대 화학과 명예 교수), 이동재(현 부경대 화학과 교수) 그리고 故 권오천(한양대 화학과 명예 교수)을 꼽을 수 있다.
1980년대는 선생님에게도 큰 변화가 온 시기이다. 1979년 12월 서강대학교 부총장직을 그만두고, 1981년 당시 여당이었던 민주정의당의 전국구 국회의원(민정당 중앙 위원회 부의장, 정책연구소 경제 제2 연구실장)으로 바쁘게 되셨지만 선생님의 연구에 대한 열정은 끊임없이 계속되었던 것 같다. 국회의원으로 입법부에서 바쁘시던 기간 중인 1980년부터 1985년까지 4년 동안 무려 14편의 논문에 선생님이 공저자로 나타나 있다. 물론 이 논문들은 1970년대 후반부터 선생님의 지도를 받았던 대학원생들 또는 함께 연구를 수행하였던 공동 연구자들의 연구결과를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 
상기 14편 논문의 공저자들은 강준길(현 충남대학교 화학과 교수), 배영일(현 울산 대학교 화학과 명예 교수), 류석환(현 울산 대학교 화학과 교수), 진준하(원자력 연구소 근무 후, 비엔나 국제 국제원자력 기구(IAEA) 근무) 그리고 고 권오천 교수(전 한양대 화학과 명예 교수)와 변형직 박사(원자력 연구소에서 퇴직) 등이다.
1987년 서강대학교 화학과로부터 정년퇴직을 하신 후에도 계속 연구에 관심을 가지셨던 선생님은 공저자로 1991년까지 4년 동안 4편(metal halide의 exchange reaction 에 관한 연구 2편, Radiolysis에 관한 연구 2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다.(Bulletin of Korean Chem. Soc.(2편), J. Korean Chem. So.(2편))
이 마지막 논문 4편의 공저자들은 진준하 박사, 류석환 교수, 배영일 교수, 변형직 박사 등이다.
학회활동
1945년 일본으로부터 귀국하신 선생님은 경도대학에서 지도교수였던  이태규 박사님을 모시고 조선 화학회(1949년 대한화학회로 개칭) 창립에 참여하셨다. 1946년부터 1972년까지 26년간 초기의 대한 화학회는 이태규(1912년 출생, 1,2대 회장), 안동혁(1906년 출생, 3,6,9,10대 회장), 김동일(1906년 출생, 4,5,8,11,12,13대 회장), 조광하(1908년 출생, 7대 회장)등 다섯 분이 회장직을 번갈아 맡으시면서 학회를 이끌었다. 우리나라 제1 세대 화학인들이라고 할 수 있는 이분들이 닦아 놓은 반석위에 오늘의 대한 화학회가 자랑스럽게 발전하고 있다. 우리나라 화학계의 제2세대(1920년 이후 출생) 화학자 그룹의 선두에 있던 고 최상업 박사님은 1962년에 화학회 간사장으로 학회 살림을 맡아 하셨고(1997년까지 대한화학회는 간사장이 모든 실무를 책임지고 운영하였다.) 1967년부터 1974년 말까지 8년 동안 대한화학회의 부회장으로 학회를 위하여 일하셨고, 1975년에 15대 대한화학 회장으로 2년을 더 봉사하셨다.  
선생님은 우리나라 화학계의 대표로서, 국제 학술대회에도 적극 참석하셨다. 예를 들면, 1968년부터 이후 8회에 걸쳐 국제순수및응용화학연맹( IUPAC, International Union of Pure and Applied Chemistry) 총회에 참석하셨다. 1980년대에는 아시아 화학연합회(FACS, Federation of Asian Chemical Society) 이사로 우리나라 화학자 대표 역할을 하시다가, 1987년에는 FACS의 회장으로 당선되어,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대규모 국제 학술 발표회의를 롯데 호텔에서 성공리에 치루었다. 1976년에는 대한화학회 대표로, 미국 화학회 창립 100주년 기념 총회에 초청받고 참석하셨다.
교육활동
선생님은 처음부터 대학/대학원 교육에 큰 관심을 가지셨다. 1945년 일본으로부터 귀국과 동시에 京城대학(현 서울대학교) 예과와 이공학부의 강사로 시작하여 전임강사(46-52), 조교수(52-54)를 거쳐 부교수(54-60)까지 하셨다. 물론 그간 미국 유학기간(53-60)을 고려하면, 실제로 서울대학교에서 가르치신 시간은 상당히 짧은 기간이었다. 미국 Purdue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박사후 연구원으로 몇 년간 더 연구를 하시다가, 1960년 정부의 초청으로 문교부(현 교육과학기술부) 기술교육국장으로 귀국하시어, 문교부와 원자력 연구소에 잠시 근무하셨지만 다시 대학으로 돌아 오셨다.
연세대학교(1961-62) 화학과 교수로 1년간, 그리고 미국의 Boston 대학교 (1962-63)에 1년간 계시다가, 한양대학교(1963-66)를 거쳐 1966년에 서강대학교에 오셨고 서강대학에서 20년 이상 봉직하시고 정년퇴직(1987) 하셨다. 당시 미국인 신부들이 운영하던 서강대학의 분위기가 선생님을 안주하게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서강대학교를 운영하던 당시 미국인 신부들의 합리적인 사고와 철저한 학사 운영 그리고 투명한 학교 운영방법이 선생님의 의욕을 돋웠을 것으로 생각한다. 선생님은  1968년부터 1974년까지 서강대학교의 대학원장으로 대학원의 연구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큰 역할을 하셨다고 들었다. 필자가 서강대학에 온 그 때(1979) 선생님은 6년째 부총장을 하시면서, 1960 - 70년대의 괄목할 만한 서강대학 발전에 일익을 담당하셨다. 그 당시 교수들은 “빼어난 교수진과 알찬 교육”을 자랑스러워했다. 선생님의 노력에 경의를 표한다.
화학과 교수로서도 학부와 대학원에서 무기화학, 물리화학, 핵화학/방사화학을 강의하셨고, 많은 석사, 박사를 배출하셨다. 선생님 연구실에서 지도를 받았던 제자들은 현재까지 여러 분야에서 상당히 활약 중이다. 
대학원생으로 선생님 지도를 받았던 사람 중에는 이미 정년퇴임을 한 사람도 여러명이 있다. 한양대학교에서 지도를 받았던 김응렬(한양대학교 명예교수), 서강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배영일 교수(울산대학교 명예교수)와 석사학위를 받은 이창환 교수(강원대학교 명예교수)가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았다. 아직도 활동 중인 현직 교수로서는 석사학위를 받은 강준길 교수(현 충남대 교수)와 박사학위를 받은 류석환 교수(현 울산대학교 교수)가 있다. 원자력 연구소에서 근무하다가 비엔나의 국제원자력 에너지 협회(IAEA) 본부에서 근무하던 진준하 박사도 선생님의 지도로 서강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이다. [선생님 연구실 출신으로 이미 퇴직을 하였거나 현직에 있는 사람들이 더 있을 것 같지만, 관련 자료 부족으로 이곳에 기술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깝다.]
1960년대까지는 대학에서 화학을 가르치기 위한 우리 말 교과서가 거의 없는 실정이었으며, 일부 대학에서는 영어 교과서를 그대로 사용하였지만 여러가지 어려움이 많았다. 선생님은 대학에서 교과서로 사용할 수 있는 다수의 화학책을 우리말로 번역하셨으며, 1970년대에는 우리말 교과서 저술에 참여하셨다. 번역서와 저서(공저 포함)로는 <핵화학 및 방사화학 (譯)>, 문운당 (1962); <무기화학 (譯)>, 문운당 (1963); <일반화학 (譯)>, 문운당 (1965); <대학화학실험법 (譯)>, 문운당 (1965); <켐스터디 화학 (譯)>, 탐구당 (1968); <일반화학 (譯)>, 광림사 (1972); <물리화학 (譯)>, 보진재 (1975); <일반화학> 광림사 1979, 등이 있다. 여기서 볼 수 있는 것 같이 선생님의 관심분야는 핵화학/방사화학, 무기화학 및 물리화학이라고 할 수 있다.  
선생님은 1964년에는 대한화학회의 術語制定 심의위원회 위원장으로, 화학 용어 한글화 작업을 추진하셨는데, 선생님의 담당 분야는 “무기화학”이었고, 당시에 "물리화학" 분야는 張世憲 서울대 명예교수님이 맡으셨다.
1964년 처음으로 화학전공 학생을 선발한 서강대학교 화학과는, 선생님을 포함한 몇몇 선배 교수님들(최상업, 沈汶澤, 吳俊錫 尹能民, 鄭求旬 등)의 노력으로 빠르게 자리를 잡게 되었고, 1970년대 중반에는 이미 국내 대학 중에서 선두 그룹에 속하게 되었다. 심문택 교수(물리화학 전공)와 오준석(무기화학 전공) 교수가 서강대 화학과를 떠난 후에도 계속해서 서강대학교 화학과가 그렇게 좋은 평가를 받았던 것에는 선생님의 리드가 큰 힘이 되었다. 오늘의 서강대학교 화학과가 있기까지 선생님의 노력이 매우 컸다는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 [서강대학 화학과는 교내·외에서 분위기가 매우 신사적이고,  교수들 간의 사이가 매우 화목하다는 평을 들었다. 항상 웃는 얼굴로 후배 교수들의 애로사항을 들어주시고, 연구 활동에서 모범을 보이신 고 최상업 박사님의 영향이 컸다고 생각한다. 물론 초기 서강대학교 화학과의 눈부신 발전을 이야기 하려면, 故 윤능민 교수님(유기화학 전공, 1927년 생)과 정구순 교수님(분석화학 전공, 1929년 생)의 기여를 빼 놓을 수는 없다.]
대학에서 주요 보직 뿐 아니라 국가과학기술 관련 자문 등으로 매우 바쁜 시기에도 선생님은 대학/대학원의 담당 과목 강의에는 매우 성실하게 임하셨다고 알려졌다. 선생님이 한양대학교에 계실 때,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강의를 하셨다. 당시 방사화학 강의 시간에 흑판에 쓰신 개조식 판서가 어떻게 깨끗한지 사진을 찍어두었다면 어느 꼼꼼한 여학생의 필기 노트북 같았을 것이라고 회상하는 선배 교수님은, 그것이 그분 성격의 일면이라고 하셨다. 필자가 연세대학교에 입학하였던 1961년에 선생님도 연세대학교에 계셨지만, 1962년 미국의 Boston 대학으로 가시기 전까지 선생님의 강의를 직접 듣지는 못했다. 그러나 선배들로부터 선생님의 강의에 관하여 많은 좋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필자가 지금도 선생님에게 죄송하게 생각하는 것은, 서강대학에서 나에게는 첫 학기인 1979년 2학기의 “무기화학”(당시 주로 4학년 학생들이 수강) 교과서를, 선생님에게 아무런 상의도 없이, 내 마음대로 바꾸었다. 초보 교수가 사전에 설명을 드려야 하는 것도 모르고 한 일이었다. 그 때까지는 선생님께서 강의하시던 과목이었는데, 당시 선생님이 사용하시던 책이 출판된지 몇 년 된 것이라서, 깊게 생각하지 않고 최신 책 “Basic Inorganic Chemistry”(F. A. Cotton과 G. Wilkinson 공저)를 교과서로 택했다. 학기 중간 쯤 돼서, “선생님께서 교과서를 바꿨어?” 하시는데 그 때까지도 눈치 없던 나는 “네‘하고 간단히 대답했는데, 후에 이런 사실을 아신 윤능민 교수님께서 ”사전에 말씀드리지“라고 하셨다. 오래 가르치면서 정성을 들였던 과목인데, 신출내기가 와서 한마디 상의도 없이 바꾸어 버렸으니 조금 섭섭하셨겠지만 일체 내색을 안 하시던 선생님이, 지금 이글을 쓰면서 다시 생각난다.]
국가 과학기술 발전을 위한 활동
1960년 미국 유학으로부터 영구 귀국하시면서 문교부의 기술교육국장,1 원자력 연구소 소장서리,2 그리고 원자력 위원으로 국가 과학기술분야에서 당시로서는 상당히 중요한 자리에 임명되셨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과학기술 분야의 연구와 행정 경험이 있는 전문 인사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면이 없지 않았다. 행정 경험이 없던 약관 38세에 이런 중요한 보직을 감당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1,2 이유야 어찌되었든 간에 그런 자리를 오래 유지하지는 않으셨다. 겨우 1년 남짓 동안에 문교부 국장(5개월 간)으로, 원자력 연구소 소장(10개월 간)으로 그리고 원자력 위원3(3개월 간)으로 일하셨다.
1960 - 70년대에 우리나라는 국가의 경제적 발전에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정부는 본격적으로 과학기술분야를 지원 육성하기 시작하였다. 과학기술 여러 분야를 포함하는 종합연구소 韓國科學技術硏究所(KIST)4와 과학기술 정책 및 행정적 지원을 주도하는 科學技術處(MOST)5 그리고 주로 대학에서 연구하는 교수와 대학원생을 체계적으로 지원하는 韓國科學財團이(KOSEF)6이 차례로 창설/설치/설립되었다. 이상 3개 국가기관이 우리나라 과학기술 국가발전에 큰 힘이 된 것을 아무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좀 못되는 현재 2012년, 이제 우리나라는 국제적으로 과학기술의 선진국 문턱에 와있다.
故 崔相嶪 박사는, 1966년 창설된 韓國科學技術硏究所, 1967년 설치된 科學技術處 그리고 1977년에 설립된 韓國科學財團의 창설과정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였으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셨다. 상기 기관들을 창설하기 위한 사전작업의 일환으로,  1966년에는 과학기술 선진국 미국 및 캐나다의 대학들과 연구기관을 시찰하고 정부에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이 보고서는 KIST 창설에 좋은 참고자료가 되었을 것이다. 故 최상업 박사가, KIST 창설 시에는 理事로, 1977년부터는 副理事長으로 KIST 발전에 일조하셨던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1976년에는 한국 측 대표 崔相嶪 박사와 미국 측 대표 Dr. Baldaschwieler 가 한미합동으로 한국의 과학재단(KOSEF) 설립 타당성을 조사하여 정부에 건의하였다. 그 다음 해에 KOSEF가 드디어 설립되었고, 崔相嶪 박사는 副理事長(초대 이사장은 당시 과학기술처 장관이셨던 최형섭 박사였음)으로 재단 발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셨다. 1979년에도 한국 측 대표로 미국의 국립과학재단(NSF)과 협의를 하여, 한국의 KOSEF와 미국의 NSF 사이의 협력을 공고히 하셨다. 그 밖에도, 일본의 대학 및 연구기관 시찰(1978) 그리고 서독의 대학 및 연구기관 시찰(1980) 등을 통하여 과학기술 선진국의 연구지원 체계 및 연구내용 그리고 연구수준 등 많은 것들을 국내의 행정부에 정책 결정자들에게 전하여 정책 결정에 도움을 주었다.
1981년부터 4년간 제11대 국회의원(민주정의당 전국구 의원)으로, 민주정의당 중앙위원회 부의장으로, 민주정의당 정책연구소 경제 제2실장이었다는 기록은 있지만, 구체적으로 국가 과학기술 관련 업무로 어떤 일을 하셨는지 별로 알려진 게 없다.
서강대학교 재직시 정기적으로 하는 신체검사에서 혈압이 높다고 판정되어 재검 병원에서 몇 번 선생님을 뵙던 생각이 난다. 1990년 대 후반부터는 건강이 좋지 않아서 몇 년간 고생하시다가 2004년에 82세로 생을 마감하신 선생님을 회상하면서, 이글을 맺으려고 한다. 故 崔相嶪 박사님 회상록을 쓴다는 것이 필자에게는 처음부터 무리였는데, 한림원의 요청을 필자가 사양하면 선생님에 관한 기록이 그대로 묻힐 것 같아서, 이렇게라도 기록을 남기고도 싶었다.
특별히 소중한 자료를 선뜻 보내주시고, 원고 수정/보완에 도움을 주신 울산대학교 화학과의 류석환 교수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고 싶다.
장남 최용희 교수(경북대학교)가 보내준 최근 소식에 의하면, 고 최상업 박사님의 미망인 정덕순(鄭德順) 여사께서는 용인에 있는 “삼성 노블카운티”에서 건강하게 지내시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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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58년 원자력법이 국회를 통과하고, 1959년 원자력연구소가 개소했고, 당시 문교부 기술교육국장으로 있던 朴哲在 전 서울대 물리학과 교수가 초대 원자력 연구소 소장으로 임명되면서 그 후임 문교부(현 교육과학기술부)의 기술교육국장으로 崔相嶪 박사가 영입되었다.
2원자력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된 정부는, 연구용 원자로 도입을 결정하였고, 1959년 7월에 한국 최초로 연구용 원자로가 인천항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이 원자로 설치에 많은 문제가 발생했다. 경험 많은 전문가도 없었고, 당시 상위기관인 原子力院과 원자로 운영에 책임이 있는 原子力 硏究所 간의 마찰도 컸다. 1960년 4.19 혁명으로 혼란이 가중되어 1960년 7월에는 사태가 최악으로 나빠져 朴哲在 당시 연구소장이 사퇴했고, 9월에는 그 후임으로 崔相嶪 박사가 원자력 연구소 소장 서리를 맡게 되었다. 그러나 연구소 내에 또 다른 내분이 생기고, 5.16 군사 쿠데타 직후 1961년 6월에 그 직책을 그만두게 되었다. 1959년 도입된 연구용  원자로(TRIGA mark-II)가 실제로 가동된 시점은 1962년 3월이었다.  
31958년 원자력법이 통과되면서, 원자력원장은 장관급, 원자력연구소장은 차관급 그리고 원자력 위원은 1급 공무원으로 임명하였다.
41965년 “한국의 공업기술 및 응용과학연구소 설립”에 관한 한·미 양국 대통령(한국의 박정희 대통령과 미국의 린든 존슨 대통령)의 공동 성명을 바탕으로 1966년에 최형섭 박사를 초대 연구소장으로,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가 설립되었다. 당시 국내 유일의 정부출연 종합 연구소였던 KIST는 우리나라 여러 과학기술 분야의 발전에 초석이 되었다. 1981년 韓國科學院(KAIST)과 통합하여, 한국과학기술원의 연구 전담부서가 되었다가, 1989년에 다시 분리되어 韓國科學技術院으로 재발족하였다.
51967년 박정희 대통령은 문교부 연두 순시에서 과학기술 전담 행정기구 설치를 지시한 것으로 시작되었다. 초대 장관으로 최형섭 박사가 임명되었다. 科學技術部 는 김영삼 정부 시절에 퇴출 위기를 겪기도 하였지만, 김대중 정부 시절에는 부 총리급 장관이 리드하는 정부기관으로 승격되어 상당한 예산권도 가지고 있었다. 2007년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면서 교육부와 과학기술부가 통합되면서(많은 과학기술자들이 통합을 반대하였었다) 현재는 교육과학기술부의 일부가 되었다.
61977년 5월 과학재단법에 근거하여, “과학교육의 진흥과 과학기술 연구능력의 배양”을 목적으로, 준 정부기관으로 韓國科學財團(Korea Science and Engineering Foundation, KOSEF)이 설립되었으며, 초대 과학기술처 최형섭 장관이 초대 이사장으로 임명되었다. 1978년부터 국가로부터 재원을 확보하여 과학기술 연구 지원 사업을 시작하였다. 1998년에는 과학기술부 산하기관으로 개편되었다. 2007년 정부가 교육부와 과학기술부를 통합하여 교육과학기술부를 만들었고, 그 후속 조치로, 2009년에는 한국학술재단(인문 사회 과학을 포함한 모든 분야의 연구를 지원하던, 전 교육부 산하기관)과 한국과학재단(과학기술분야 연구를 중점적으로 지원하던, 전 과학기술부의 산하기관)을 통합하여 현재의 韓國硏究財團(Korea Research Foundation, KRF)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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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진종식 (서강대학교 화학과 명예교수)
필자는 1979년부터 1987년까지 故 崔相嶪 박사님과 함께 無機化學을 가르쳤다. 故 崔相嶪 박사님이 정년퇴직 하시던 1987년에는 학과장을 하면서 선생님의 조촐한 정년퇴직 기념식을 준비하고, 퇴직 기념강연회 사회를 보았던 기억이 떠오른다. 재직 시절에는 故 崔相嶪 박사님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많이 가졌었고, 화학과 교수 夫婦同伴 모임에서 선생님의 사모님과의 만남은 항상 즐겁고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었다. 故 崔相嶪 박사님이 퇴직 후 지내시던 곳은 용인 “삼성노블카운티”로, 선배 교수들과 함께 찾아뵙던 그 때의 선생님의 모습은 언제나처럼 자상하게 웃던 그대로 이셨다.  
 
한국과학기술한림원으로부터 故 崔相嶪 박사님의 회상록 집필을 요청 받고선 조금 망설였다. 필자보다 더 오랜 동안 선생님과 함께 지낸 선배 교수들이나 제자 중 한분이 쓰시는 것이 좋을 것 같았었기 때문이었다. 한림원은 계속 필자가 쓰길 원했고, 더 이상 사양할 수 없게 되었다. 막상 쓰기를 시작하려고 하니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난감했다. 필자가 가지고 있는 정보는 극히 제한적이었고, 기억 속에 있는 것이 전부였다. 다행히 故 崔相嶪 박사님의 제자 중에 현재 울산대학교에 교수로 있는 류석환 교수로부터 일부 자료를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일단 인터넷 찾기를 이용하여 객관적인 정보를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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