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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학부] 故 전무식 박사님 회상록

이름 |
관리자
Date |
2012-12-26
Hit |
15947


연구실에서의 전무식 선생님


전무식 선생님 가족, 부인이신 배숙원 여사, 뒷줄 가운데 장남 전영민 박사와
차남 전영호 박사, 삼남 전영인 박사



전무식 선생님의 평생 연구 주제 였던 육각수와 오각수 그림이 새겨진 묘비

 


사회적 배경
 

선생님은 부친 전영숙공으로부터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으며 성장하셨고 특히 변호사인 백부 전영택공의 영향을 받아 성실하고 정직함의 생활을 익혀 평생의 생활신조로 삶고 사셨다. 백부의 영향을 많이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법이 지닌 냉정함이 맞지 않았던 선생님은 백부의 가족들과는 달리 순수학문의 길을 선택 하셨다.  항상 배려의 마음으로 주위 사람들을 대하고 한번 인연을 맺으면 평생 함께하는 사람들과의 신뢰를 중히 여기셨다.

선생님은 어려서부터 머리가 뛰어 났고 특히 수학에 천부적인 재능을 갖고 계셨다.  이에 더하여 성실과 근면함으로, 실력이 출중한 학생으로 진주중학교를 거쳐 명문 경북중학교 5학년(지금의 경북고등학교 2학년)에 수석으로 합격하고 이후 재학기간 줄곧 수석을 놓치지 않았으며 졸업도 수석으로 하여 상으로 금시계를 받으셨다. 졸업 후 서울대학교 화학과에 수석으로 입학했으나, 일주일도 안 되어 6.25동란을 맞아 친구 네 명과 함께 걸어서 고향인 대구를 향해 가시게 되었다.  가는 도중에 김천 근처 다리에서 쉬고 있는데 갑자기 전투기가 지나가며 기관총을 쏘아 주위 사람들은 심한 부상을 입었으나 선생님은 가까스로 살아남아 계속 대구로 향하셨다. 그러다가 이번에는 인민군을 만나 또 한 번의 죽을 위기를 맞았으나 수석 졸업 상으로 받은 금시계를 주고 위기를 넘기고 서울을 떠난 지 70 여 일만에 무사히 고향 대구에 당도하시게 되었다. 도착 후 뛰어난 영어실력을 바탕으로 미군부대의 통역관으로서 활동을 한동안 하게 되었다. 그러나 선생님의 성실하고 정직한 성품을 시기했던 사람이 야밤에 칼을 들고 방에 침입하여 선생님을 해하려 하였으나, 가까스로 도망쳐 나와 세번째 죽을 고비를 넘기게 되었다. 이로 인해 통역관 일을 그만 두게 되는데 이를 매우 안타깝게 여겼던 미군 사령관은 선생님의 정직함과 성실함을 본인이 책임지고 보증하며 세계 어느 곳에서 근무하든 적극 추천한다는 추천서를 써주었다.

이와 같이 어려운 상황들을 겪으면서도 항상 학문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학업에 정진을 하다 보니 선생님은 자연히 검소한 생활과 성실하고 근면한 습성이 몸에 배게 되었다. 선생님은 뜨거운 열정과 순수성을 가지고 학문을 사랑하고 연구를 즐기며 평생을 과학자의 길을 걸으셨다. 정계로부터 입각의 유혹도 여러 번 있었으나 선생님은 모두 정중히 거절하셨다. ‘과학자는 과학의 숲을 떠나면 죽는다’는 철학을 고집하며 권력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40여 년을 외도하지 않고 오로지 연구와 연구토양 조성을 위한 활동만 하셨으며 타계하기 직전까지도 연세대 특별교수로서 왕성한 연구 활동을 계속하였다. 선생님의 인생에 대한 정직한 자세와 주위 사람들에 대한 따뜻하고 순수한 애정은 선생님이 이루신 그 어떤 학문적 업적보다도 기억에 남으며 선생님을 더욱 그리워하게 만들고 있다.
선생님은 특히 제자들에 대한 애정이 매우 각별하였으며, "한 손에 논문, 다른 한손에 제자가 있으면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다"고 늘 말씀하셨다. 이러한 선생님의 철학은 형제와 자식에게도 영향을 끼쳐 동생인 전명식박사는 미국 카네기 멜론 대학교의 화공과 교수로, 전주식박사는 서울대 전산과 교수가 되었다. 또한, 장남 전영민박사는 KIST 책임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며, 차남 전영호박사와 삼남 전영인박사 모두 선생님의 뒤를 이어 학자 집안을 이루게 되었다.  

선생님은 순수과학이 천대받고, 우수한 학생들이 개인의 안일한 삶만을 위해 이공계를 기피하는 현실을 매우 안타까워 하시며 다음과 같이 강조하여 말씀하셨다. “영재는 곧 국가의 자산입니다. 뉴턴이나, 아인슈타인처럼 영재를 키울 수 있는 영재교육이 꼭 필요합니다. 영재들이 빨리 독립된 환경에서 연구를 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가능성 있는 연구자를 한 사람이라도 발굴, 집중 지원하는 것이 우리 과학기술 수준을 빨리 끌어올릴 수 있는 길입니다. 이런 현실이 타개되지 않으면 국가경쟁력을 높이거나 선진사회로 가기 어렵습니다.”  요즘은 국가적으로도 기초과학에 대한 지원이 매우 개선되었으나  그 당시 기초과학 불모지에서 선생님은 선각자로서 과학 전도사로서의 역할을 충실하게 하셨던 것이다.

 
 
선생님에 대한 회고
 
내가 선생님의 회고록을 쓰게 된 이유는 아마 졸업 후 서울에서 직장을 가지고 긴 시간을 선생님 곁에서 연구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여러 일들을 함께 하였기에 선생님을 가장 잘 알 것이라고 생각 하는 주위 분들의 권유 때문인 것 같다.  그러나 막상 회고록을 쓰려 하니 어떻게 시작을 해야 할까 한참 고민을 하게 된다.  선생님께서는 민족의 고난의 시기와 전란 그리고 과학 기술의 엄청난 변화와 발전의 시기를 몸소 겪으셨다.  한국의 물리화학 발전에 많은 업적을 남기셨고 더 크게는 한국의 과학발전에 많은 공헌을 하셨다. 그런데 이런 공헌들을 중심으로 회고록을 쓰자니 너무 사무적이고 형식적인 회고록이 될 것 같다. 전무식교수님을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선생님을 일 외에 대할 기회가 많지 않아 인간적인 면을 잘 모를 것 같아 이 회고록은 가능하면 주위 사람들과의 만남과 생활을 많이 포함하려 한다.
내가 선생님을 처음 뵌 것은 1978년 봄으로 한국과학원 화학과에 입학하면서 부터다. 입학 동기인 현 충북대 교수인 강영기박사가 물리화학을 전공하려면 무조건 전무식교수님 방 학생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또 연세대학교 화학과의 은사이신 최재시교수님과 이용근교수님으로부터도 강력 추천을 받은 터라 꼭 전무식교수님 실험실 (보통 “물방” 이라 부름)에 들어가고 싶어 합격이 발표 되자마자 선생님을 찾아뵈었다. 선생님의 첫 인상은 내게는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매우 권위적으로 보이고 인간적으로 다가가기에는 힘든 평소 내가 생각하는 교육자와는 많이 다른 느낌이었다. 허나 내가 학문을 하러 대학원에 왔으니 이런 느낌은 실험실을 결정 하는데 큰 변수가 되지 않았다.  
두 번째 겪은 혼란은 내가 연구주제를 정할 때였다.  입학 후 한두 달 정도 됐을 때 연구 주제를 정하는 문제로 선생님과 면담을 했다. 지금도 기억하는데 3~4개정도의 주제를 제시하시면서 이 중에서 주제를 정하던지 아니면 주제를 찾아와도 좋겠다고 하셨다. 그 당시 많은 고민을 했기에 지금도 그 주제가 뚜렷이 생각난다. 냄새 인식에 관한 메카니즘, 통계역학적인 물의구조 연구 (SST, Significant liquid Structure Theory), 그리고 제올라이트의 이론적 연구였다. 그 외에 내 개인적 관심은 양자역학적인 계산 분야였다. 냄새에 관한 메카니즘은 요즘 중요한 연구 분야 중 하나이고 제올라이트에 관한 이론적 연구는 요즘도 활발하게 진행 되는 분야이다. SST 연구는 입학 동기 중 현재 강릉대학교수로 있는 윤병집박사가 하게 되어 나는 고민 끝에 제올라이트에 관한 이론적 연구를 시작 하였는데 이 분야의 연구는 국제적으로도 초기 단계였다.  이외의 주제들도 많이 생각 해 보았는데 그 당시 내 실력으로는 힘든 일인 것 같았다.  연구 주제를 정하기 위한 노력은 거의 한 학기 정도 지속됐고 이 기간 나는 연구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고 평생 연구자의 길을 가게 되는 계기가 된 것 같다. 대학원생에게 이런 시간은 매우 귀중한 경험이 되는 것 같다. 내 개인적으로도 이 기간에 대한 중요성을 알고 있기에 내 실험실에 입학하는 학생들에게 같은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교수가 된 후 초기 10년간은 내가 하고 싶은 연구 주제를 일방적으로 학생에게 배당하여 연구를 하였으나 점차 이 방법이 학생들의 창의성을 저해한다는 생각이 들어 나도 모르게 선생님의 교육 방법을 사용하고 있는 것을 발견 하였다.
선생님의 인간적인 면에 대한 내 생각은 선생님과 시간을 보내면서 많이 바뀌게 되었다. 선생님은 자신의 행동에 대해 그리고 사람들의 자신에 대한 판단이나 평판에 대해 설명을 하거나 변명을 하는 분이 아니셨다. 자주는 아니셨지만 제자들 특히 실험실의 선배와 그 이전의 제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는데 놀랄 만큼 각 제자들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고 계셨고 각자의 어려움에 대한 이해도 상당히 많으셨다. 자세하게 설명은 하지 않으셨지만 제자 중에 여러 형편으로 늦게 공부를 시작한 제자들에 대한 배려도 항상 하고 계셨다. 내가 보기에 제자 중에는 선생님을 섭섭하게 해 드린 분들도 계셨는데 절대 섭섭함을 나타내지 않으시고 다른 사람들에게 주로 그들의 장점을 칭찬하는 것을 여러 차례 보았다. 허나 능력이 충분히 있는 제자들이나 주위의 과학자들이 연구를 등한시 할 때에는 이를 강하게 질책하셨다. 학문에 대한 철학이나 자신의 삶의 관리는 내가 처음 선생님을 뵐 때부터 작고하실 때까지 일관되고 변함이 없으셨다.
선생님의 아주 귀중한 관계 중의 하나가 이태규교수님과의 만남인 것 같다. 내가 입학시 물방에 배정된 대학원생의 수가 모자라 석사과정 기간 나는 행정적으로는 이태규교수님 지도 학생으로 되어 있어 두 분을 함께 볼 기회가 자주 있었다. 이태규교수님은 전무식교수님을 평상시에는 전박사라 호칭하셨는데 가끔 많이 화가 나신 경우에는 전무식군이라 부를 만큼 전통적인 사제지간이었다. 내 입학 초기 이태규교수님이 퇴근하시기 전에는 교수님의 방에 불이 꺼지지 않는 것을 알았다. 가끔 바쁜 일이 있으시면 불을 켜 놓고 퇴근하시고 수위에게 불을 끄게 하신 적이 있던 것도 알고 있다. 이런 것이 형식이라기보다는 선생님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지금 생각한다. 이 일은 이태규 교수님께서 아들처럼 아끼신 운전기사가 가정에 일찍 귀가 하도록 하는 배려 차원에서 일찍 퇴근 하실 때까지 계속 됐던 것 같다. 오직 연구에만 관심이 있는 것 같아도 과의 행정원이나 일반 근로자들에게 까지 관심을 가지시는 분이셨다.
나의 5년간의 대학원 기간 동안 선생님의 학문에 대한 생각을 잘 알게 해준 것은 바로 랩 미팅 시간이다. 여느 실험실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보통 한주에 한번 랩 미팅을 하는데 발표는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한다. 랩 미팅의 내용을 주로 연구대상 현상에 대해 어떤 분석을 했는가? 그리고 이를 어떻게 모델이나 이론화 할 것인가를 설명하고 토론하는 것이다. 어떤 생각을 하며 노력 했는가가 랩 미팅의 가장 관심 된 주제였다.  선생님께서는 학생들을 신뢰하시므로 어떤 학생이 한 달 이상 랩 미팅에 아무런 발표가 없어도 좋은 생각을 제안 할 때까지 재촉하지 않고 기다리셨다. 토론은 주로 생각의 합리성과 현상을 설명하려 사용하는 역학상 모순이 없는지 등으로 주로 학생들 간의 토론으로 이어졌다. 요즘 내 실험실 랩 미팅도 이와 비슷하게 진행되고 있으며 학생들의 창의성이나 졸업 후의 연구 생활을 위해 아주 좋은 방법이라 생각한다. 선생님은 이론연구실과 고분자 관련 실험실 두 개를 운영하셨는데 실험과 이론을 하는 학생들이 함께 랩 미팅도 하고 서로의 방법을 사용해 보려 하는 과정에서 많은 학문적인 도움을 받았다.
선생님은 자신이 설립부터 참여하여 가장 왕성하게 연구하고 봉사한 시절을 보낸 한국과학기술원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이 대단하셨다. 이런 생각이 제자들에 대한 깊은 애정과 또한 제자들의 연구와 하는 일에 대한 깊은 신뢰로 나타났다. 당시 많은 교수님들이 자녀들을 외국 유학을 보내던 시절에 큰 아들과 막내 아들을 한국과학기술원에서 학위를 받게 하셨다. 아마 이런 자부심이 현재의 한국과학기술원을 만드는 밑거름이 되었으리라.   
선생님께서는 전통적인 가장이라 가정사를 말씀하지 않으시므로 제자들이 선생님댁의 일을 잘 모른다. 그런데 나는 선생님 사후에 막내아들 전영인박사와 한 6년간 연구를 함께 할 기회가 있었다. 이 시기 도리어 선생님의 생존시 보다 더 많은 인간적인 면모를 알게 되었다. 선생님의 아들에 대한 세심한 배려와 사랑이 전영인박사가 가지고 있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아버지의 학문에 대한 존경을 통하여 강하게 전달되었다.
교수님께서는 그 당시 매우 열악한 국내의 연구 환경을 개선하고 또한 후학들에게 국제 첨단의 연구를 접하게 하시려 부단한 노력을 하셨다. 그 중 하나가 대한화학회가 지금 출간하고 있는 SCI 잡지이며 한국의 화학 연구에 중요한 기여를 하고 있는 Bulletin of Korean Chemical Society의 발간이었다. 1980년도에 창간하였는데 이 시기 교수님께서는 많은 반대에 직면하고 계셨다. 그 당시는 국‐영문 혼용 잡지인 Journal of Korean Chemical Society가 발간되고 있었고 그 잡지에 실리는 논문의 수도 그리 많지 않은 상황이었다. 따라서 왜 논문수도 별로 많지 않은데 잡지를 하나 더 만드냐고 반대가 심하였다. 이때만큼 교수님께서 심하게 분노를 표출 하신 것을 본적이 없다. 당시 나는 학생이라 학술지 창간에 관련 된 자세한 내용은 모르지만 교수님이 꼭 필요한 일을 하신다고 생각했는데 현 시점에서 보니 후학들을 위하여 매우 중요한 일을 하셨다고 생각한다.
나는 대학원에 있으면서 여러 분의 세계적인 과학자를 만나게 되었고 이 만남이 나의 과학자로서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 교수님은 국내의 교육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한 방편으로도 여러 형태의 국제협력을 추진하셨다. 그 중 일본의 분자과학연구소 (Institute of Molecular Science, Okazaki)와의 인력교류 프로그램과 2년마다 개최 되는 한‐일 분자과학 심포지움은 양국 간의 분자과학분야 학문의 격차를 좁히는데 많은 기여를 하였다. 나는 1985년에 당시 최고의 분자과학 실험장비와 양자화학의 전문가들이 모인 일본분자과학연구소에서 몇 개월간 체류하였는데 이 기간 새로운 연구방법 등 귀중한 체험을 하였다. 이후로도 많은 한국의 젊은 과학자들에게 지속적으로 이런 기회가 주어졌다. 이 두 협력 사업을 만드시는 과정을 옆에서 보면서 교수님께서 일을 추진하시는 열정과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시는 것을 보고 개인적으로는 많은 배움을 얻었다.  
  
1991년도에는 KAIST에 분자과학연구센터를 SRC (Scientific Research Center) 사업으로 설치하여 이 분야 젊은 연구자들의 연구를 10년간 지원하였다. 이 센터에 소속되어 연구했던 과학자들이 현재 한국 분자과학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당시 이미 기초과학의 지원이 상대적으로 축소되어 가던 당시 상황에서 분자과학센터의 소장으로 10년간의 헌신은 학자로서 선생으로서의 길을 가는 많은 후학들에게 좋은 귀감이 될 것이다.   
교수님이 한국에 모신 여러 과학자중 몇 분이 생각난다. 은사이셨던 Henry Erring 교수님은 질병으로 기저귀를 차시고도 한국을 방문하셨다.  교과서에서 배웠던 그리고 이태규교수님을 통하여 강의를 들었던 절대반응속도론의 제안자를 보게 된 것도 기쁜 일이었지만 교수님께서 어린아이 같이 기뻐하시는 인간적인 면을 뵐 수 있었다. 또한 교수님의 초청으로 일본의 Kenichi Fukui 박사님이 노벨상을 받기 며칠 전에 한국을 방문하여 개인적으로도 양자계산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특히 이 방문에서 이태규 교수님께서 교토대학 교수시절에 양자 화학을 강의 하셔서 Fukui 교수가 양자화학을 시작하게 된 계기란 말씀에 매우 큰 자부심도 가지게 되었다. 이후 코넬대학교의 Harold Scheraga 교수가 한국을 방문하여 물방에서 대학원생 각자의 하는 일에 대하여 물어보시고 의견도 말씀해 주시는 좋은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이즈음 물방의 이론연구의 주된 주제는 핵산 및 단백질 구조를 연구하는 것이었다. 물방은 물방답게 물이 단백질의 구조를 결정하는 주된 원인이라는 입장에서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는데 Scheraga 교수는 다른 접근방법을 사용하고 계셨다. 이 큰 관점의 차이는 오히려 이 만남 이후 두 분이 오랜 기간 함께 연구를 수행하는 시발점이 되었다. 이후 윤병집, 강영기, 나 그리고 윤창노 박사가 Scheraga교수의 연구실에서 연구를 하였다.  오랜 기간 두 분은 서로를 대 학자로서 인정하고 존중하는 보기 좋은 관계를 유지하였다. 교수님 타계 이후 Scheraga 교수님이 자청하여 전무식교수 추모 심포지움에 참석하시어 강연과 교수님과의 추억에 관한 말씀을 해 주셨다. 또한 러시아 과학의 우수성을 강조하시면서 아시아 및 동구 유럽과 많은 교류를 하셨고 이에 따라 여러 러시아 과학자들이 한국을 방문하여 많은 연구 교류를 하였다.
이 시점에서 내가 개인적인 추억들을 몆 가지 이야기 하려 한다. 서울에 직장을 가진 제자들이 별로 없었던 탓에 교수님께서 초청했던 많은 학자들 안내는 주로 내 몫이었다. 방문하는 모든 학자들의 교수님에 대한 깊은 신뢰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빠듯한 예산에도 경비를 철저하게 챙겨 주시며 제자에게 절대 경제적 부담을 주지 않으려 노력하셨다. 
내가 숭실대학교에 재직시 컴퓨터를 이용한 생체분자구조와 신소재설계를 위한 분자설계연구센터를 1997년에 설립하였다. 이 연구센터는 컴퓨터를 이용한 분자설계 연구에 관심이 있었던 물방의 졸업생과 재학생들의 공동연구 및 모임의 구심체가 되었는데 교수님께서는 이의 설립에 매우 흡족해 하시고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셔서 지원해 주셨다. 연구센터가 짧은 시간 내에 성장하고 대외적으로 알려진 데에는 교수님의 큰 지원이 있었다. 연구센터의 운영을 자율화하고 소속 연구원에게 안정적인 직장을 제공해 줄 목적으로 법인으로 독립해야 하겠다는 의견을 교수님께 말씀드렸고 교수님을 이사장으로 당시 산자부의 허가를 받아 사단법인 연구소로 독립을 하였다. 이 과정에서 많은 문제가 생겼다. 숭실대학교 소속의 연구소에서 재산이 분리되어야 하는 과정에서 대학과 일개 교수인 내가 동등하게 협의하기에는 너무 힘든 일이었다. 이때 교수님께서 이 연구소를 꼭 안정화시켜 이 분야 연구의 구심점이 돼야 한다는 신념으로 앞장서서 숭실대학교의 실처장들과 여러 차례 만나 직접 협상 해 주셨다. 필수 장비 및 S/W들 그리고 수탁 받은 연구비를 독립법인으로 옮겨 줄 것을 설득하여 원래보다 축소된 규모이기는 하지만 독립 재산을 가지게 되었다.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원장 및 과학계의 원로의 위치에 계신 교수님께서 인내성을 가지고 숭실대 측을 설득하고 부탁하는 일들을 마다하지 않고 지원해 주신 것은 지금 생각해도 너무 감사한 일이다. 다음 해에 내가 연세대학으로 옮기면서 사단법인 분자설계연구소가 연세대학교 내의 건물로 이주하면서 이사장실을 연구소 내에 만들고 바쁘신 일정에도 불구하고 아침 일찍 출근 하셔서 연구소의 정신적 중심이 되셨다. 지금도 교수님께서 쓰시던 이사장실에 앉아 있노라면 문득 교수님 생각이 나곤 한다.
교수님께서 돌아가시기 두 달 전쯤 몸이 좀 마르신 것 같아 여쭈어 보았더니  웃음을 지으시면 그 특유의 말투로 “노박사 나 요즘 수영장에서 걷는 운동을 한다구요” 하시면서 몸이 가벼워서 좋다고 하셨다. 교수님께서는 International Council for Science 산하의 CODATA 한국 위원장을 맡고 계셨는데 일본이나 중국의 활약은 매우 큰데 반해 한국의 활동이 미미하여 국제네트워크와 국제회의 참석 등을 통해 한국의 위상을 높이려 활동하고 계셨다. 이때도 CODATA 국제 회의에 참석 하려 준비 하고 계셨다. 나는 러시아에서 열리는 국제회의에 출국하면서 인사 드렸는데 교수님 출장 후에 보자고 하셨다. 그런데 러시아에 있는 동안 교수님을 20년 가까이 모시던 비서인 이혜란씨로부터 교수님께서 입원하셨다는 연락이 왔다. 입원하신 것도 굳이 CODATA에 참석하시겠다는 것을 사모님이 극구 말리시면서 입원을 하셨다고 들었다. 큰 바위처럼 묵묵하게 그리고 꾸준하게 본인의 맡은 바를 충실하게 담당하며 사신 삶이었다. 급하게 입국해 삼성병원에 찾아가 뵈니 좀 야위었지만 웃으시면서 맞이해 주시고 여러 시간동안 이런저런 해야 할 일과 생각들을 말씀 하셨다. 특히 연구소가 좀 더 성장하고 안정화 되도록 도와줘야 하는데 하시며 많이 아쉬워 하셨다. 이미 췌장암이라 얼마 시간이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아셨음에도 너무 담담하셔서 도리어 내가 무언가 잘못 알고 있나 생각했다. 사람들의 방문을 구지 마다하시고 사모님과 두분께서만 조용한 시간을 보내셨다. 한 주후 다시 찾아 뵌 교수님은 병색이 완연하였지만 아주 의연한 모습으로 맞이해 주셨다. 이때 제자들에 관해 많은 말씀을 하셨고 특히 자리를 잘 잡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에 대해 걱정을 많이 하셨다. 교수님이 돌아가셨을 때에 많은 선배, 동료, 후배 과학자들과 제자들이 교수님의 갑작스런 타계에 놀라고 깊은 애도를 표하였다. 김우식 대통령비서실장과 오명 과학기술부장관, 김명자 국회의원, 박찬모 포항공대총장 등 각계 인사들은 한 목소리로 평생 과학자의 길을 걸으며 한국 과학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높이 기렸다.
선생님은 제자 양성에 대한 각별한 소명의식을 가지고 계셨다고 생각한다. 상황에 관계없이 항상 후학들을 양성하셨다. 제자들은 선생님께서 미국에서 교수 생활을 하실 때, 동국대학교에 일시 재직 시 그리고 KIST에 재직 시의 제자들도 있으나 대부분의 제자들을 한국과학기술원에 재직하면서 배출하셨다. 총 55명의 박사와 24명의 석사를 배출하셨다.  그들은 현재 세계적인 과학자로 최고의 교육자로 기업가로 각자의 한국의 과학과 경제발전에 큰 공헌을 하고 있다. 
교수님의 연구의 중요한 파트너며 경쟁자였던 코넬대학교의 Harold A. Scheraga 교수께서 회고록을 쓴다는 연락을 받고 다음과 같은 메모를 보내 오셨다.
 
In Memory of Professor Mu Shik Jhon 
I first became aware of Professor Mu Shik Jhon in the 1970’s when he was working on water structure in collaboration with Professor Henry Eyring at the University of Utah. Shortly after that, I met Professor Jhon at a conference in Korea at which we had the opportunity to discuss our mutual interests in research on the structure of water and its role as a solvent for polar and non‐polar molecules. As a result of this meeting, Professor Jhon invited me to visit his laboratory on many occasions for collaborative interactions with him and with his Ph.D. students. This was the start of a long‐time collaboration with Professor Jhon and his students, with many of his students working as Postdoctoral Research Associates in my laboratory at Cornell University. Professor Jhon also visited my laboratory, and presented a lecture, during the time that his students were working with me. It was always exciting to exchange ideas about our mutual work with Professor Jhon, and it was sad that we could no longer continue this personal interaction when he passed away. His legacy continues in the laboratories of the students he trained, enabling them to continue their research careers in academic institutions in Korea.
                                                                                                                                                                            November, 13, 2012 
                                                                                                                                                                            By Harold Scheraga

업적 및 의미
 
선생님은 왕성한 학구열을 가진 과학자이셨다. 생전에 물을 비롯한 액체의 구조에 대한 연구, 생체분자의 구조연구, 실험적인 방법을 이용한 물과 고분자간의 상호작용연구, 제올라이트 등의 소재연구 그리고 컴퓨터를 이용한 연구 방법의 개발 등 실로 다양한 분야에서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잡지에 270편의 논문을 국내외에 발표했다. 특히 ‘물의 구조’ 및 ‘전해질의 구조’ 연구는 국제적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 선생님께서 제안하신 Significant Liquid Structure Theory (SST)는 컴퓨터를 이용한 시뮬레이션 방법이 보편화되기 전까지 가장 정확한 액체 이론이란 평을 듣고 있다.
선생님은 한국 과학자로는 최초로 미국 화학회 지원 연구비(연 24000달러)를 지원받아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30대 후반의 젊은 나이에 미국 항공우주국(NASA)에서 초청강연을 하셨고, 액체 및 물 연구의 석학으로서 일본 분자과학연구소, 동경대, 코넬대, 모스크바대 등 세계의 주요 대학 및 연구소에서 240여회의 초청강연을 하셨다.   왕성한 연구활동으로 제10회 과학기술 대통령상(당시 최연소(45세)수상), 제1회 이태규 학술상, 한국과학기술한림원상, 국회과학기술대상, 한국과학기술원 학술상을 수상하셨다. 1997년 KAIST에서 정년 후 대통령 과학기술자문위원, 한국과학기술한림원(KAST) 원장, 전국과학기술인협회(NASEK) 회장, 한국노벨과학상 수상지원본부(KASS) 대표 등을 역임하시며 후학들의 연구환경 개선을 위하여 노력하셨다. 또한 이 기간 선생님은 아시아 오세니아지역 21개국이 참가한 아시아과학한림원연합회의 초대회장, 99년에는 280년의 역사를 가진 러시아과학한림원의 종신회원으로 선출되었다. 선생님은 항상 이 회원 뱃지를 학자로서의 최고의 자긍심으로 여기고 달고 다니셨다.
선생님의 인생은 물 연구 그 자체였다. 수많은 독창적 연구결과를 발표하여 이론화학의 발전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그의 연구업적 가운데 대표로 꼽히는 것은 ‘물의 3형태론’과 ‘육각수론’이다. 다음은 요즘도 물의 구조 연구에 전념하고 있는 선생님의 막내 아들인 전영인박사에게 도움을 받아 물 연구에 관한 것을 정리한 내용이다.
물의 3형태론이란 생체 속의 물은 XYZ 등 3종류로 존재한다는 것, 즉 X형은 정상상태의 물의 구조로, Z형은 얼음과 유사한 상태로, Y는 이들의 중간 구조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3가지 종류의 물이 있다는 이론에 따르면 인공장기를 이식할 경우 인공장기의 물은 생명체의 물과 성질이 같아야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피가 엉겨 마비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선생님은 또한 액체상태의 물은 개개의 분자가 모두 독립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물분자는 5개 또는 6개가 각각 5각형, 6각형 고리를 이루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고, 이들 간 변화는 집체적으로 일어나며 고리에 존재하는 물의 분자수는 온도의 함수로서 표현된다는 것을 제안하였다. 특히 정상적인 생명체에서는 물이 6각형 고리구조의 구조화된 상태를 이루지만 당뇨병이나 암환자의 세포에서는 육각수가 오각수로 바뀌어 무질서하게 움직인다는 것을 처음으로 밝혔는데 이것이 바로 ‘육각수론’이다. 또한 나이가 들수록 세포 안의 물의 구조가 흐트러져 밖으로 빠져나가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피부의 주름 등 노화를 일으킨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정상세포가 바라는 물을 찾아서 공급해주면 암, 당뇨는 물론 노화에 대한 예방과 치료가 가능하다는 것을 실험을 통해 제안하였다. 이는 단순히 물의 구조의 변화가 질병에 따른 세포의 변화에 기인한 결과로서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닌, 세포 주위의 물의 구조를 바꿈으로써 세포 자체, 즉 생명체 자체의 상태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보다 적극적인 개념의 이론이며, 이것이 선생님이 특별히 강조했던 ‘분자론적 물환경설’이다. 이러한 이론들은, 생물체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지만 너무나 흔하고 너무나 막연하여 간과하였던 물의 생물학적 중요성을 액체구조 및 원자차원의 물리화학적 측면에서 지적하고 이를 이해할 수 있는 이론적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는 데에 그 중요한 의의가 있다. 부작용이 없고 효과가 뛰어난 치료방법을 우리는 물의 구조변화에서 얻을 수 있을지 모르며 이것이 가능하게 된다면 그 근간에는 선생님이 이루어 놓으신 이론들이 뒷받침을 하고 있을 것이다.
또한 선생님은 물을 연구하면서 그 실험적 연구의 한계 때문에 자연히 컴퓨터를 사용한 계산화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당시 불모지였던 한국의 관련 학문과 기술을 발전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상선약수(上善若水).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고, 사람들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머문다. 그러므로 물은 최상의 선(善)과도 통한다 할 것이다. 평생 물을 연구하고 물처럼 살다가 물처럼 돌아가신 전무식 선생님은 오로지 과학자로서의 외길을 걸으며 소신 있게 살아왔기에 더욱 아름다운 인생을 살아온 물박사 전무식으로서 영원히 기억될 것으로 생각한다.
 
교수님의 연구 분야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964~1970


            
            
            SST를 바탕으로 주로 액체 이론 및 이를 이용한 응용 연구


            이온성 액체에 관한 이론적 연구


            특수 환경에서의 물의 성질 연구


            
        
        
            
            1971~1980


            
            
            액체 이론 및 응용 연구 지속


            생체 고분자 연구


            Hydrogel 연구 (Wet Lab. 운영)


            생체분자의 컴퓨터를 이용한 구조 연구 시작


            생체분자의 수화 연구


            제올라이트에 관한 이론적 연구 시작


            
        
        
            
            1981~1990


            
            
            He, C 등 액체이론 적용 및 super cooling 물에 관한 연구


            P‐HEMA 실험적 연구


            단백질, RNA의 구조 및 수화에 관한 연구


            제올라이트 구조, 수화 및 동역학적 성질연구


            양자화학적 계산, 분자진동, 분자동역학적 시뮬레이션 적용


            컴퓨터를 이용한 계산에 필요한 알고리즘 및 포텐셜함수 개발


            물의 구조 및 물과 질병 간의 관계에 관한 연구


            
        
        
            
            1991~


            
            
            고분자 및 고분자와 물간의 상호작용에 관한 실험 연구


            단백질 구조 결정 알고리즘 개발 


            단백질의 구조 및 기능에 관한 이론적 연구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이용한 액체 이론 연구


            생체분자 구조 결정 포텐셜함수 및 수화 모델 개발


            특소 환경에서의 물의 구조에 관한 연구


            
        
    



집필자: 노경태 (연세대학교 생명공학과)

  필자는 1978년에 연세대학교 화학과를 졸업하고 1987년부터 한국과학기술원 (입학 당시 명칭은 한국과학원)에 입학하여 전무식 교수님의 지도로 이론물리화학, 계산화학으로 1980년 및 1983년에 각각 석사 및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1983년부터 2002년 까지 20년간 숭실대학교 화학과 및 생명정보학과에서 교수로서 봉직하다 2003년부터 연세대학교 생명공학과의 교수로 재직중이다.  1985년 일본 분자과학연구소 Morokuma 교수 연구실에서 방문교수로 양자화학적 계산에 관한 연구를 수행하였고 1987~1989년 그리고 1996~1998년 코넬 대학교 화학과의 Scheraga교수 연구실에서 방문교수로서 단백질 연구를 위한 많은 계산 방법들을 개발하였다.


  1997년도에 분자설계연구센터를 숭실대학교 내에 설립하여 2001년도에 전무식 교수님을 이사장으로 (사)분자설계연구소로 독립하였고 설립 이래 현재까지 소장으로 재직 중에 있다.   이 분자설계 연구소를 통하여 국내의 대학, 연구소 및 기업에 컴퓨터를 이용한 신약 및 신소재 설계 기술을 보급하여 국내 관련 학문이나 산업경쟁력 향상에 기여하였다. 


   아시아에서의 컴퓨터를 이용한 신약개발 및 생명과학 연구의 협력을 위하여 한국-중국-일본 3국이 참여하는 Asian Hub for e‐Drug Discovery (AHeDD)를 2005년도에 설립하여 현재까지 한국 위원장 및 공동 위원장을 맡고 있다.  매년 심포지엄 개최 및 협력연구를 통한 한‐중‐일 간의 협력체계를 구축하였다.


  현재 연세대학교 내의 융합신약연구센터 소장을 맡아 병원-대학-연구소 간의 협력 연구를 통한 신약 개발 연구를수행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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