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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학부 - 故 문인형 박사 회상록

이름 |
관리자
Date |
2015-01-26
Hit |
7996
집필자: 석명진 (강원대학교 재료금속공학과 교수 )


 


 



 



“괴팅겐 대학의 막스플랑크 물리학연구소장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박사. 그는 서독에서 추앙을 받고 있는 과학계의 태두일 뿐 아니라 아인슈타인 박사 이후에 전 세계 물리학계를 리드하고 있는 세계 제일의 물리학자다. 본사에서는 서독 브란덴부르크 주재 문인형 기자로 하여금 다망한 박사에게 서신을 내어 최근의 물리학계의 흐름과 그의 근황 등에 대해 문의 한 바 친절하고도 상세한 답을 보내 주었다. 


 


다음은 하이젠베르크 박사와 문 기자와의 문답.”
1966년 9월22일자 중앙일보 창간 1주년 기념호에 실린 하이젠베르크 교수와 문인형 기자와의 인터뷰 기사를 소개하는 글이다. 1983년 한국표면공학회장, 1993년 한국분말야금학회장 그리고 2001년 대한금속재료학회장을 역임하고 2004년 한양대학교 신소재공학부 교수로 정년퇴임한, 정통 금속공학자인 문인형 교수님은 물리학과를 졸업한 물리학도로서 독일 유학 기간 동안 틈틈이 중앙일보 과학부 기자로도 활동하였다. 그래서인지 교수님은 글 쓰는 것을 좋아하였고 특히 멀리 있는 제자들에게 편지 보내는 것을 즐겨하였으며, 실제로 글도 잘 썼다. 대학신문, 기업체의 사보 등에도 전공과 관련된 내용이든 일상생활의 교훈적인 이야기든 많은 글을 남겼다. 나는 그런 교수님의 글쓰기 활동이 교수님의 함자에 ‘문인’이란 어휘가 들어있어서가 아닌가하고 조금은 황당한 생각도 해본 적이 있다. 개인적인 자리에서는 끊임없는 재담을 펼치지만 공식석상에서의 대중을 향한 교수님의 언변은 그러나 그리 달변은 아니었다. 강의실에 들어가기 전에 항상 수업준비를 하긴 하지만 청산유수의 강의와는 거리가 먼 듯싶다. 그러나 그 내용을 찬찬히 들어보면 개념의 핵심은 반드시 짚고 넘어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문외한인 사람이 듣기에는 이해하기 힘든 것이겠지만 말이다. 기실 그게 더 중요한 것이 아닌가? 그래서 겉만 광택 나는 내용 없는 이야기는 잘 하지 않는다.
내가 교수님을 처음 만났던 것은 4학년 2학기 강의실에서였다. 그때까지 대학생활을 방황하고 있던 나는 4학년 2학기 들어 공부 좀 하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교수님 과목을 수강한 덕택에 더욱 공부에 대한 의욕을 갖게 되었다. 교수님으로부터 수강한 두 과목에서 모두 A학점을 받았던 것이다. 교수님의 애쓰는 표현 속에서 다행스럽게도 나는 범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그 강의의 내용을 제대로 알아들었나 보다.


교수님의 금속공학자로서, 교육자로서의 연구와 교육활동은 한국과 독일의 금속학계의 긴밀한 교류를 증대시킴과 더불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교수님은 가히 우리나라의 독일 유학 1세대로서 한국 금속학계와 독일 금속학계 간의 가교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DAAD(독일 학술교류처) 장학생으로 일찍이 독일의 뮌스터(Münster) 대학에 유학하였고(1960년대 후반) Alexander von Humboldt 재단의 펠로우와 막스플랑크(Max-Planck) 금속연구소의 초빙 연구원으로서 독일에서 연구 경력을 쌓았으며(1970년대 초), 위 재단의 Humboldt 상을 수상한 바 있다(1995년). 또한 명망 있는 독일 금속학회의 명예회원으로 추대되었다(2000년). 이러한 독일과의 개인적인 인연을 토대로 우리나라의 금속학계와 독일 금속학계와의 폭 넓고 긴밀한 교류를 성사시켜 금속공학 분야의 교수와 연구자들이 독일 금속학계와의 공동연구, 인적교류를 활성화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당시의 많은 사람들이 대부분 그러하였듯이 교수님께서도 학창시절 그리 넉넉지 못한 환경 속에서 학업을 이어 나간 것으로 우리 제자들에게 말씀하곤 하였다. 서울중학교, 서울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물리학과에 진학한 이후 대학생활 내내 가정교사를 하며 학비와 생활비를 충당하였다. 내가 대학원에 다니던 1980년대 초반에는 연구조원의 연구수당을 교수님께서 봉투에 넣어 직접 대학원생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매월 정해진 날짜를 하루라도 넘기지 않았다. 당신께서 가정교사 생활을 하던 시절 가정교사 수당을 제때에 받지 못했을 때의 절망감을 익히 알기 때문에 절대로 날짜를 어길 수 없다고 하던 말씀이 떠오른다. 연구비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지 그 당시의 연구비 관리는 지금처럼 치밀하지 않았다. 그러나 교수님은 항상 영수증을 챙겼고, 제자들은 교수님의 말씀대로 꼼꼼하게 집행하였다. 한국과학재단에서 연구비 감사가 나왔을 때 교수님께서 한양대학교 대표로 연구비 감사를 받기도 했었다. 1970년대 어느 해엔가는 집행하고 남은 그리 많지 않은 연구비를 반납하려고 한 적이 있었는데 회계담당 직원이 오히려 당혹해하면서 행정적인 처리가 번거로우니 어떻게든 집행하라고 당부했을 정도로 연구비를 허투루 쓰는 법이 없었다. 1990년에는 세계 평화교수협회의 연구상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때 상금으로 500만원을 받았는데 그것을 우리들이 수행하는 과제의 연구비로 투입하였던 것을 기억한다. 연구 성과로 받은 상금이니 만큼 연구 활동에 사용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지금 내가 동일한 상황이었다면 어떻게 하였을까 라는 생각을 해보면 얼굴이 달아오르지 않을 수 없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교수님은 성실함과 꼼꼼함으로 점철된, 제자들이 따라 하기 힘들 정도의 올곧은 모범적인 인생을 살았다. 이것은 곧 규칙적인 생활로 이어져,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항상 8시에 출근하여 5시에 연구실을 나섰다. 매주 월요일 9시에는 어김없이 연구미팅을 한다. 대학교수로서 33년간 지켜온 규범이었다. 연구실을 나서기 전에는 항상 우리들이 상주하고 있는 실험실에 미소 띤 얼굴을 살짝 내밀고 “나 먼저 퇴근 하네”를 던지곤 하는 것도 일상이었다. 학창시절 역시 모범생의 전형, 요즘의 세속적인 표현을 빌자면 ‘범생’이었음에 틀림없을 것이라고 나는 단언한다. 교수님의 학창시절의 사진을 보면 항상 차렷 자세를 유지한다. 그 뿐인가? 한번은 대학원 초년 시절에 교수님 연구실에 청소하러 들어갔다가 서가에서 우연히 교수님께서 대학교 1학년 시절 작성한 물리실험 노트를 발견한 적이 있다. 20여 년 전의 옛날 노트를 보관하고 있다는 사실에서가 아니라 또박또박 써 내려간 행간의 글씨와 내용을 보고 그 가지런한 정돈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모범적인 생활은 성실한 연구 활동으로 이어졌고 이것은 또 탁월한 선구자적인 연구업적을 이룩하는 토대가 되었다. 1970년대 초반 독일 막스플랑크 금속연구소(슈투트가르트)에서 분말야금 연구를 수행하고 귀국하여 분말야금 불모지였던 우리나라에 분말야금 연구를 태동시킨 이래 우리나라의 중요 자원이었던 텅스텐의 분말야금 연구에 교수님 연구생활의 대부분을 할애하였다. 텅스텐 분말야금의 연구뿐만 아니라 MIM(금속분말 사출성형)공정, MA(기계적 합금화)공정 등 지금은 보편화 되었지만 우리나라에서 효시가 될 만한 연구들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1970년대만 하더라도 우리나라 대학에서 국제학술지에 게재되는 논문의 수는 보잘 것 없었다. 교수님께서는 1970년대 초반부터 매년 국제학술지에 논문을 투고하였으며 정년퇴임 시까지 국내외 학술지에 220편의 논문을 게재하였다.


일상생활에 임하는 성실한 자세, 학창시절부터 몸에 밴 검소함과 겸손함, 연구에 대한 열의와 업적 등은 우리 제자들의 교수님에 대한 존경심의 근간이 되지만 무엇보다 존경의 마음을 갖게 하는 것은 교수님의 제자들에 대한 아낌없는 애틋한 사랑이다. 교육자로서 제자에 대한 사랑을 표출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우리의 교수님은 정말이지 마음에서 우러나는 사랑을 베푸셨다. 그것이 형식적인 꾸밈의 제스처 인지 마음에서 우러나는 애틋한 사랑과 보살핌의 감정인지 우리들은 금방 알 수 있었다. 꾸지람과 호통이 수반되기도 하였지만 돌이켜보면 그것도 이내 교수님의 사랑의 품안으로 녹아들었다.
문하생 리스트를 확인하니 교수님의 정년퇴임 시까지 석사과정이나 박사과정을 거쳐 간 학생이 79명이고 학계와 산업계에서 이제는 중견인력으로 성장하여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그 중 23명이 국내외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으며, 또 그 중 11명이 교수님을 귀감삼아 대학에서 교수로 봉직하고 있다.
“문 교수가 배출한 많은 제자들 역시 스승의 본을 받아 문제를 분명히 파악하고, 연구와 기술의 원활한 상호작용이 가능하도록 하여 목표와 질적 수준을 제고시키는 과학자로서의 성공적인 역할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문 교수의 연구실은 실험적으로나 이론적으로 한양대학교의 일류 연구실로 성장하였으며, ‘문인형 학파’는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연구그룹이 되었습니다. 그의 제자들은 지금 도처에서 연구와 교육, 경영의 요직을 맡고 있습니다. 스승에 대한 존경과 감사로 연결된 그들에게 문 교수의 65회 생신과 정년기념식은 특별한 자부심을 선사하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
교수님의 정년퇴임에 즈음하여 독일 막스플랑크 금속연구소장과 독일 금속학회 회장을 역임한 독일 금속학계의 대표적인 인사인 페초우(G. Petzow)교수가 보낸 서신의 일부분이다.
이 서신을 받은 그 다음 해, 장맛비가 거세게 몰아치던 여름 날 짤막한 투병생활을 마감하고 교수님은 우리 곁을 떠났다. 돌아가시기 며칠 전 아련하게 꿈속에서 잠깐 뵈었던 것이 마지막이었다. 


내년 기일에도 필시 장맛비가 쏟아질 것이다. 바지가 흙탕물에 흠뻑 젖으면 어떠하랴. 교수님 무덤가 맨땅에서 털썩 무릎 꿇고 시원하게 삼배할 것이다. 우리 제자들 모두.


 



[문인형 교수님 연보]


1939년 서울에서 출생함.
1959년 서울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물리학과에 입학함.
1962년 4학년 1학기를 마치고 통역장교로 입대하여 1965년 제대함. 
1964년 서울대학교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 물리학과에 입학함.
1965년 과학부 기자로 중앙일보에 입사함. 독일유학중에는 독일주재 특파원으로 활동
1966년 서울대학교 대학원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DAAD 장학생으로 뮌스터(Münster) 대학으로 유학을 떠남. 
1969년 독일 뮌스터 대학 졸업 (이학박사). 독일 Alexander von Humboldt 재단 펠로우로서 1970년까지 뮌스터 대학에서 연구     활동을 계속함.
1970년 독일에서 귀국하여 한양대학교 재료공학과 교수로 부임함.


1970년 이래(이하 연도표기 다음 ‘이래’ 생략) 독일금속학회(DGM) 정회원


1975년 미국 분말야금학회(APMI) 정회원 


1977년 분말야금 국제 플란제(Plansee) 협회 회원 


1984년 영국재료학회(IOM) 펠로우, Intern. J. of Powder Metallurgy 국제협력위원


 2000년 아시아 재료 학술원 정회원 등의 활동을 함. 학술지인 Materials Science Forum, Science of Sintering의 편집위원, Powder Metallurgy Review의 심사위원을 역임함.
1973년 독일 슈트트가르트에 있는 막스플랑크(Max-Planck) 금속연구소에서 객원연구원으로 1년간 체류. 막스플랑크 금속연구소장이었던 페초우(G. Petzow) 교수와의 인연을 시작함. 이후 페초우 교수와 지속적인 유대관계를 맺고 한국과 독일 금속학계의 긴밀한 교류를 이룸.
1977년 국영기업이었던 ㈜대한중석광업의 기술고문으로 위촉됨. 1985년까지 8년간 기술고문으로 활동함.
1980년 대한금속학회(현 대한금속재료학회) 이사. 1991년까지 재임함.
1983년 한국표면공학회 회장으로 선출됨. 1985년까지 재임함.
1985년 한국과학재단 프로그램개발 및 평가위원회 위원. 1987년까지 활동함.
1986년 ‘백남상(한양대학교 재단)’, ‘청웅상(대한금속학회)’ 수상
1987년 대한물리학회 ‘응용물리’ 편집이사로 선임되어 1991년까지 활동함.
1988년 대한금속학회 분말야금분과위원장으로 선임되어 1992년까지 활동함.
1990년 세계 평화교수협회 ‘연구상’을 수상함. 한국과학재단 국제협력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되어 1992년까지 활동함.
1992년 ‘최우수논문상(대한금속학회)’ 수상
1993년 한국과학기술단체 총연합회의 ‘최우수논문상’을 수상함. 한국분말야금학회 창립을 주도하고 초대회장으로 선출되어 1997년까지 4년간 회장으로 활동함. 한국분말야금학회 발전의 초석을 다짐.
1994년 한국과학기술한림원 발기인으로 동 한림원의 창립에 기여함. 이후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정회원으로 활동함.
1995년 독일 Alexander von Humboldt 재단의 ‘훔볼트(Humboldt) 연구상’ 수상. 대한물리학회 부회장으로 1997년까지 선임됨. 동시에 ‘물리학과 첨단기술’ 편집위원장을 맡음. 한국공학한림원 발기인으로 동 한림원의 창립에 기여하고, 이후 한국공학한림원 정회원으로 활동함. 1998년부터 2000년까지 출판위원회 위원장, 2000년에서 2002년까지 상벌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함.
1996년 한양대학교 산업과학연구소장으로 보임됨. 2002년까지 6년간 산업과학연구소장으로 재임함.
1998년 한국표면공학회 ‘학술상’을 수상함. 대한금속학회 부회장으로 선출됨.
1999년 한양공학원장에 보임됨. 2002년까지 3년간 산업과학연구소장과 공학원장을 겸임함. ‘대한민국학술원상’을 수상함.
2000년 한국분말야금학회 ‘최우수논문상’을 수상함. 대한금속재료학회 수석부회장에 선출됨.
2001년 대한금속재료학회 회장으로 추대되어 1년간 재임함.
2002년 한양대학교 대학원장으로 보임됨. 2004년 정년퇴임 시까지 대학원장으로 재임함.
2004년 33년6개월간 한양대학교 공과대학 신소재공학부(재료공학과) 교수로서 연구와 후학 양성의 소임을 다하고 정년퇴임함.
2005년 정년퇴임 1년 후 가족과 제자들의 슬픔 속에 영면함. 


 


[문인형 교수님은 국내외 학술지에 220편의 논문을 발표하였고 2건의 특허를 출원하였으며 7권의 저서 및 번역서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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